머피를 만난 날
머피를 만난 날
  • 김규원
  • 승인 2024.12.26 11: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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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수필
조 건/수필가
조 건/수필가

​가을장마는 처마 끝에 걸려 갈 길을 잃고 하늘에는 사흘 굶은 시어머니 상을 한 먹구름이 심통을 부리며 비를 뿌려댄다. 지구는 이미 자제력을 잃어버렸다.

자연은 순환의 기억을 망각해가고, 눈과 비를 내려야 할 곳을 착각하여 열대지방에 폭설을 내리게 하고 사막에 폭우를 내려 물난리를 겪게 하는 이상한 현상으로 종말을 예감하게 한다.

닷새째 비를 뿌리더니 미안한지 한쪽 하늘을 쳐들어 희미한 빛을 보여준다. 며칠 발이 묶여 답답하던 차에 얼른 운동화를 챙겨 신고 천변을 향해 줄달음 쳤다.

습도가 높아서 상쾌하지는 않았지만 공기는 맑고 오랜만의 외출은 약간의 흥분을 부르고 발걸음은 가벼웠다. 골목길을 꺾어서 천변으로 들어서는 찰나, 화물차 한 대가 쏜살같이 지나며 길옆에 고인 물을 튕겨 물벼락을 친다.

“야! 이 개 호랑말코 **야!” 공허한 메아리만 돌아오고 화물차는 나 잡아 보란 듯이 줄행랑을 친다. 어쩌면 온 몸에 빈틈없이 골고루 물벼락을 안기는지 참 기술도 좋다,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냥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려다 생각하니 비에 갇혀 있던 지긋지긋한 시간이 생각나 다시 천변을 향해서 걸었다. 공원 화장실에 가서 심 봉사 배추 다듬듯이 대충 휴지로 닦아 내고 삼천 천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한껏 불어난 개울물은 무심한 듯 흐르고 징검다리 위에 앉은 백로는 멍하니 물속을 바라보며 숙연하다. 만보(萬步)를 채울 즈음에 갈증이 강하게 느껴왔다. 편의점을 찾아서 급히 실론티를 하나 들고 와 바코드를 찍고 캔을 따서 시원하게 마신 다음 카드를 내밀었다.

“돼지 카드는 안 되는데요?” 하필 많은 카드 중에서 안 되는 카드를 가져오다니 이런 낭패가 있나! 현금도 없고 방법을 몰라 멍하니 있는데 “계좌 이체 하세요”한다.

언뜻 얼마 전 팔수가 자랑삼아 “야 이제는 AI 시대라 은행 갈 것도 없이 인터넷 뱅킹도 하고 간편 페이도 있어서 전화로 결제한다”라며 “무식한 중생들아 중국에서는 거지도 깡통 대신 QR 코드 걸어놓고 동냥한다는데 빨리 딸내미에게 부탁해서 설치 들 해”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미뤘던 후회가 밀려온다.

캄보디아에 있는 딸이 생각났다. “딸! 아빠가 아무것도 없이 나왔다. 계좌 불러 줄 테니 1.300원 만 보내주라” “우리 아빠 불쌍해서 어쩌나 1300원도 없어서.” 그렇게 해결하고 나오는 뒷머리가 서늘하다.

밖으로 나오자 이슬비가 내리고 있다. 마침 커다란 벽면에 실사된 사진 속 순댓국이 너무 맛있게 보이며 설핏 시장기가 들었다. 벌써 6시 무렵이다. 비도 피할 겸 끼니도 때울 겸 식당에 들어섰다.

돼지카드 가능한지부터 확인하고 순댓국을 시키고 전화기를 뒤적이다가 탁자 옆에 있는 수저통에서 수저를 꺼내서 돌아서는 순간에 순댓 국을 가져온 알바 아가씨가 비명을 지르고 나도 모르게 “앗! 뜨거워라” 비명을 질렀다.

내가 돌아서면서 뚝배기를 탁자에 놓으려는 아가씨 손을 치고 말았다. 국밥은 내 앞으로 쏟아지고 그릇은 바닥으로 굴렀다. 뜨거움에 화장실로 달려가서 옷을 벗고 찬물로 씻어 내고 나왔다. 아가씨는 사색이 되어 “어머 사장님 죄송해요. 제가 주의했어야 하는데”

주인이 다시 요리를 해주겠다고 했지만, 그냥 가겠다고 계산하라고 하니 굿이 돈을 받지 않겠다고 극구 사양한다. 아가씨에게 내 실수가 크다고 안심시키고 식당을 나왔다. 공원의 정자에 앉아 생각해보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귀신에 홀린 것도 같고 내 신세가 처량하다. 콧등이 시큰해지며 서러움이 밀려 온다.

그때였다. 봉두난발(峰頭亂髮)에 맨발, 한 손에는 반쯤 남은 일회용 커피를 든 거지 선생이 내 앞에 서더니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민다. “돈 없어!” 버럭 소리를 지르니 흠칫 놀랜다. 그러더니 커피를 나에게 내민다. 아니 요즘 거지는 식후 디저트로 커피를 습관적으로 마시나 보다 하고 “이거 어디서 샀어?” 물어보니 공원 옆 쓰레기장을 가리킨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온다. 그 친구가 나를 스캔하기를 같은 직업군으로 판단한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옷은 젖어 생쥐 꼴이고 흙탕물 냄새에 순댓국 냄새까지 혼합해서 풍기니 그렇게 느끼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래 좋다. 오늘은 아무래도 머피의 마법에 걸린 것 같다. 이렇게 처절하게 짜인 머피의 각본에 빠진 걸 일진이 나쁘다고, 또는 재수가 없다고 하기도 하고, 운이 없다고도 하지. 그래서 인간은 신에게 돼지머리도 바치기도 하고 고액을 주고 푸닥거리도 하나 보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불행은 막을 수 없어도 그 불행을 초연하게 감사함으로 그를 대하면 머피도 놀라지 않을까? 그래 좋다. 소낙비야 내려라. 더는 무서울 게 없다. 흙탕물도, 순대 국물도, 삶의 비릿한 모순의 냄새도 모두 쓸어 가버려라.

더하여서 분노의 괴성도, 썩어 냄새나는 욕망도, 처절한 외로움의 그림자도, 모두 머피의 보따리 속에 담아서 쓸어가거라. 그리고 나는 내일쯤 꽃향기 타고 환한 웃음으로 내게 달려오는 샐리를 만나 해리의 안부를 묻겠다.

그 동안 나를 피해갔던 신의 섭리가 깃든 행운의 선물을 받고, 칸타타와 소나타가 멋지게 어우러진 음악에 맞추어 샐리의 법칙이라는 막춤을 한판 추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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