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여인
해변의 여인
  • 김규원
  • 승인 2024.08.08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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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만/수필가
이용만/수필가

해변의 여인. 그냥 말만 들어도 시원하게 보이고, 멋져 보인다. 영화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진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런데 어떤 이야기가 없는 데도 내 마음속에 각인된 해변의 여인이 있다.

하루 1만 보 걷기를 고집하면서 세워놓은 ‘걷기 3원칙’이 있다. 첫째, 빨리 걸을 것. 둘째, 고개 들고 허리 세우고 걸을 것. 셋째, 발을 쭉쭉 벋어서 걸을 것이다. 거북목을 바르게 잡고 허리를 펴기 위해서다.

‘발을 쭉쭉 벋으며 걷는 것’은 베트남 다낭에 가서 배워온 걷기 방법이다. 그것이 나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자세에도 도움이 되었고 건강에도 도움이 되었다.

베트남 다낭은 한국인이 하루에 4천여 명씩 오고 간다는 곳이다. 그야말로 한국인 전용 관광지다. 전날 저녁 다낭에 도착하여 호텔에서 잠깐 잠을 자고 일어나 새벽에 커튼을 걷었을 때 눈 앞에 펼쳐진 해변의 모래밭이 장관이었다.

미케비치 해변이라 했다. 길게 벋은 모래밭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더운 열대지방이라 새벽에 활동을 하는 것이다. 거기, 내 눈을 끄는 사람이 있었다. 해수욕복을 입고 발을 쭉쭉 벋으며 걷고 있는 두 여인. 키가 커서 다리도 긴 탓일까? 발을 맞추어 걷는 그들은 시원스럽게 발을 벋으며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 멋져 보였다. 내가 거북목을 교정하기 위하여 취해야 할 바로 그 자세였다.

다음 날 새벽에 커튼을 열었는데 그 여인들이 다시 나타났다. 불티나게 옷과 신발을 챙겨 해변으로 나갔다. 그들은 벌써 해변 저쪽까지 가 있었다.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한참 후에 그들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내 곁은 스쳐 지나갔다. 현지인은 아니었고 관광객인지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외국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얼굴도 곱고 몸매도 좋았다. 참 멋진 사람들이었다.

곧바로 그들의 뒤를 따라 나도 다리를 쭉쭉 벋으며 걷기 시작했다. 걸음을 빨리하여 따라갔는데도 얼마 안 가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나는 숨이 가쁘고 다리가 아파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진다.’ 라던 그 말이 맞는 말이었다. 부지런히 따라갔지만 이내 그들은 나에게서 멀어져갔고 나는 그 자리에 섰다. 그들은 황새였고 나는 뱁새였다.

그들이 걸어간 발자국이 내 앞에 길게 나 있었다. 내가 따라가기에는 벅찬 황새 발자국. 지금까지 내 걸음 폭을 모르고 걸어왔구나. 뒤를 돌아보니 내 발자국이 보인다. 작은 뱁새 발자국. 그것이 나의 발자국이었다. 왜 나는 뱁새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을까.

처음부터 황새걸음을 걸었더라면 황새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너무 멀리 와버렸다. 이제는 황새걸음으로 걸으려 해도 힘에 부쳐 행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대로 말 수는 없지 않은가? 황새걸음을 보았는데 어찌 뱁새걸음으로만 걸으랴. 해변의 여인처럼 빨리 못 걸어도 천천히라도 황새걸음으로 걷자. 황새 흉내를 내면서 걸어보자.

당시에 나는 거북목을 교정하려고 무척 힘들어했다.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거북목 바로 잡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길을 가다가도 전신주나 평평한 벽이 나오면 뒤꿈치부터 어깨까지 그곳에 대고 자세를 바르게 세운 다음에 걸어가곤 했다.

‘머리 들고, 허리 펴고, 가슴 펴고’를 구호처럼 뇌이며 걷고 있었다. 그러면서 정작 걸음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다낭 미케비치 해변에서 본 두 여인의 발걸음이 내 머리에 각인이 되었다. 걸을 때마다 ‘미케비치 해변의 여인처럼’을 생각하며 발을 쭉쭉 벋으며 걸으려고 애를 썼다.

몇 달을 ‘다낭의 미케비치 해변의 여인처럼’을 중얼거리며 걸었더니 자세가 당당해지고 발걸음에 힘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걷다 보면 신발을 끌면서 걸어가는 사람을 볼 수 있다. 뒤꿈치부터 땅에 대는 게 아니라 덥석덥석 발바닥 전체를 땅에 대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때는 발을 쭉쭉 벋고 보폭을 넓혀서 걸어보라고 권한다. 그러면 알려주어서 고맙다고 말한다. 때로는 지쳐서 신발 끄는 소리를 낼 때가 있다. 그때도 천천히 걸어도 발을 쭉쭉 벋고 보폭을 넓히면 신발 끄는 자세가 없어진다.

베트남 다낭의 미케비치 해변은 어느 여행지보다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참 좋은 여행지뢰 기억된다. 다시 한번 가 보고 싶은 해외 여행지에 다낭을 선정하고 미케비치 해변에 가서 그때 그 여인들처럼 발을 쭉쭉 벋으며 멋지게 백사장을 걸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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