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가 프랑스에 간 까닭은
한지가 프랑스에 간 까닭은
  • 전주일보
  • 승인 2024.06.12 09:2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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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년전주한지포럼 김정기 대표

“저 행렬이 뭐예요?” 일행 중 한명이 묻는다. “무지개 깃발에 요란스러운 복장을 보니 LGBT-성소수자 퍼레이드 같은데요.” 지프차 확성기로 음악과 구호를 외치고 수백의 사람들이 손팻말과 플래카드, 각종 깃발을 흔들며 행진한다. 성소수자 아닌 사람들도 흥겨운 분위기다.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마주한 5월 마지막 주말 퀴어축제 현장이다. 

오를레앙(Orléans).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130여km. 루아레주의 주도다. 영불 백년전쟁 때 영국군에 포위되었으나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1429년 5월 극적으로 해방되었다. 해마다 5월 7, 8일에는 성대한 축제가 열린다. ’영웅소녀‘ 잔 다르크 기마상이 시 중심 광장에 우뚝 서 있다. 시내 곳곳이 잔 다르크 서사가 살아있다. 장소마다 스토리텔링으로 활력이 넘친다. 미국 남부 ’재즈의 고향‘으로 불리는 루지애나주 ’뉴 올리안즈(New Orleans)‘가 프랑스 지배 당시 오를레앙 이름이 영어로 바뀐 곳이다. 

지금 세계는 팝이나 재즈보다도 K-POP, 드라마 등 한국문화 열풍이다. 피디가 속한 전주의 한 단체, (사)천년전주한지포럼이 프랑스에 초대된 건 우연이 아니다. 그 뜨거운 바람 속에 지난해 SNS을 통해서 ’오를레앙 K-Culture Festival(K-POP, 태권도, 한식, 한국어)‘에 한지도 함께 콜라보 해보자는 제안이 왔다. 기꺼이 응했다. 프랑스는 지방도시 곳곳까지 한류열풍. 한국 하면 어디서나 대접받는 분위기다.

“저게 정말 종이로 만든 항아리예요?” 한지 지승(紙繩, 지끈)으로 만든 달항아리를 살피던 관객이 묻는다. 수백km를 달려 온 우리 교민이다. 감탄사와 함께 다음날은 와인과 치즈, 쵸콜릿 등 선물도 듬뿍 가져왔다. 삼삼오오 현지인들도 생경한 눈빛이다. 행사장은 시 외곽의 올리베(Olivet)시민체육관. 한지작품전과 닥종이 인형, 열쇠고리 체험이 이루어졌다.

한지(韓紙). 버드나무, 뽕나무로 만든 종이도 드물게 있었지만, 닥나무가 주종이다. 닥나무는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등 삼남 지방에 주로 자란다. 중부지방 위로는 기후가 추운 탓으로 거의 없다. 전북지역은 예부터 고려지(高麗紙)로 이름을 떨쳤다. 전주는 경판본(京板本)에 맞서던 완판본(完板本)으로 ’낙양(洛陽)의 지가(紙價)‘를 올리던 곳이다. 전주와 완주, 임실 순창 등이 우리 종이의 모태다. 기록에는 닥과 물이 ’종이 뜨기‘에 적지라 내려온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편에 “중국 황실에서는 고려지를 으뜸으로 찾았다.”고 전한다. 

명(明)·청(靑)시대 황실 보수와 그림, 책자 등에 고려지만 썼다. 중국 선지(宣紙)의 갈대와 일본 와시(和紙)의 삼지닥 보다도 한지 닥나무 섬유가 가지고 있는, 질기고 투명하고 강한 영속성이 월등했기 때문이다. 자칭 세상의 중심이라 했던 중국 황실에서 볼 때 강소성 선성(宣城)지역에서 나오기에 선지, 조선은 고려지, 일본은 화지라 명명했을 거란 해석이다.

1960년대 중반, 전주 팔복동에 국내 최초 양지(洋紙)공장 전주제지가 들어선 것도 우연의 일치는 아니다. 세한제지, 전주제지, 한솔제지로 이어지는 한국 양지의 역사가 전주에서 시작되었다. 예부터 고려지로 ’종이의 으뜸‘으로 손꼽았던 ’전주한지‘ 때문이다.

한지는 흔히들 99번의 공정을 걸친다고 말한다. 그래서 백지(白紙)라 부르기도 한다. 일백 백(百)에서 한 획이 빠진 흰 백(白)이다. 닥나무를 베어, 말리고 찌고(삶고) 건조하고 도침하고 잿물과 햇빛에 탈색해서 황촉규 풀에 물뜨기를 한다. 그리고 다시 건조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수작업이다. 기계식이 아닌 핸드메이드(Handmade)다.

1990년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시대가 바뀌면서 종이는 사용하지 않을 걸로 생각했다. 하지만 대체 수요가 늘었고, 고급지 선호 경향이 더욱 뚜렷해졌다. 시장에서 고급은 일본 화지. 저가 종이는 중국이나 태국산 소재로 만든다. 하지만 최근에는 루브르 박물관과 바티칸 교황청에서도 고문서를 복원하는데 전주한지를 사용했다. 인공지능(AI)시대. 종이의 무한 가능성이 열려있다. 미국 엔디비아가 어느새 애플을 제치고 전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치가 큰 기업으로 올라섰다. 세상은 빛의 속도로 진화 중이다.

“짝 짝 짝” 박수와 와∼탄성 연속이다. 이날 한국문화페스티벌의 피날레인 한지패션쇼는 화려한 궁중의상으로 시작해, 웨딩복, 니트 생활복까지 80여 벌. 체육관에 모인 5백여 프랑스 관객들은 늦게까지 한지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행사 후 나무에 걸었던 한지등(燈)을 선물로 나눴다. 참여자들 모두 “어떻게 한지로 생활용품과 옷을 완벽하게 만들어낼 수 있었나요?” “맥시∼ 맥시” 큰 감탄을 표한다. 

전북의 문화정체성. 소리와 한식, 한지다. 그중 미래먹거리 산업 주춧돌로는 한지가 제격이다. 세계 유일 ’종이 메카‘ 전북. 급하다. 우리시대 새로운 먹거리. 종이가 답이다.

#김정기(前 KBS전주 편성제작국장). KBS PD. 1994년 다큐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시작으로 ‘지역문화’와 ‘한민족 디아스포라’에 관심이 많다. 3.1절 기획 ‘무주촌 사람들’ ‘키르기즈 아리랑’. ‘한지’ ‘’백제의 노래‘ 등 30여 편의 다큐멘터리와 ’아침마당‘ ’6시내고향‘ 등 TV교양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지금은 오로지 전북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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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성 2024-06-12 14:21:15
항상 우리의 뿌리를 잘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전북의 자랑 한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