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 강력한 처벌 있어야
학교폭력, 강력한 처벌 있어야
  • 전주일보
  • 승인 2012.01.03 09: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너무 충격적이다. 너무 놀랍다. 어린 학생들이 이다지도 잔인했더란 말이냐. 대전에서, 대구에서 연속적으로 죽어가는 학생들을 보며 머리에 솟구쳐 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 없다.

학교폭력의 만연이 하루 이틀 사이에 더 커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진 않지만 이렇게 더럽혀질 줄은 차마 모르고 있었다. 나는 학교폭력의 무서움을 일찍이 깨닫고 예방운동에 전념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다. 학교폭력예방신문을 발행하여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럼에도 그 실상에 대해서는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 넘어가고 있었음을 솔직히 시인한다. 그것은 외피(外皮)로 나타나는 문제점만을 얼기설기 얽어야 하는 재외자였기 때문이다. 학교폭력은 어느 학교에서나 판을 치며 초등에서 대학에까지 이른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감성이 풍부할 때가 중고등학교다. 중고등학생들은 잘못된 입시정책으로 어려서부터 입시에만 매달린다. 영어와 수학에 치중하는 강요된 수업은 대부분의 학생으로 하여금 학업에 대한 흥미를 잃게 만들었다.

겉으로는 별다른 문제가 안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실력의 양극화가 심하다. 학업에 흥미를 잃고 관심에서 멀어진 학생들이 못된 작당(作黨)을 한다. 몇몇이 짝패를 이뤄 만만한 학생 하나를 골라 잡는다. 짝패들이 패거리의 위세로 학생 하나쯤 주눅들게 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다.

말로만 위협해도 꼼짝하기 어려운데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수밖에 없다. 요즘 학생들을 보면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와 같다. 비바람 들이치고 따가운 햇살에 타들어가는 아픔을 겪으며 굳세게 살아남은 야생초와는 근본이 다르다.

보호받는 온실에서 꽃은 화려할 수 있지만 줄기는 허약하다. 툭 거느리기만 해도 부러진다. 전쟁의 참화를 겪거나 산업화 과정의 빈곤을 경험하지 못한 나이어린 학생들은 괴롭고 가난했던 과거를 물려주지 않겠다는 부모의 과보호로 점점 약체화했다.

육체적으로도 약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더 쇠약하다. 난관을 뚫고 도전하려는 자세가 없다. 불굴의 투지를 생성하지 못한 것은 교육당국의 안일한 발상에 기인한다. “학생들은 보호 받아야 한다.”“학생들에게도 인권이 있다.”“학생들의 자율권은 보장해줘야만 한다.”

학교 교육이 온통 ‘학생’에게만 쏠려있다. 물론 학생은 학교의 주체다. 그러나 주체이면서 객체임을 깨달아야만 한다. 학교는 근본적으로 선생님들에 의해서 운영 되어야 한다. 학생들에게 끌려 다니는 학교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지금 우리의 학교에서는 교사가 학생을 두려워하는 전도현상(顚倒現象)으로 교육은 망조가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같은 반 친구들의 따돌림을 견디다 못한 대전의 여고생이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다는 뉴스는 차마 눈뜨고 보기에도 두렵다.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중학교 1학년 학생 두녀석이 짜고 한 학생을 9개월에 걸쳐 온갖 박해를 가했다는 얘기는 듣는 이의 귀를 의심하게 만든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고층에서 뛰어내리기 전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짐승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잔인할 수 없다. 학교 교육의 근본책임은 교육전반을 관장하고 있는 교육당국에 있다. 이러한 사례와 문제점이 그동안 누적되어 왔음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이 일시적인 미봉책으로 은근슬쩍 넘어갔기 때문에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해학생과 피해학생은 모두 피해자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가해학생에 대한 처리를 소홀하게 다루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몇몇의 학생이 집단을 이루고 장기간에 걸쳐 때리고, 빼앗고, 모욕을 주면 죽지 않을 장사가 없다. 지금 이 시간에도 죽어가는 학생이 없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가해학생들이 아직 나이가 어리다지만 간교하고 치사함은 도를 넘었다.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악행은 죽은 학생의 유서에 너무나 절절하게 표현되어 있어 산 사람의 가슴을 찢는다. 반독재투쟁을 한다는 이유로 정보부에 끌려갈 때마다 당했던 고문(拷問)도 이보다 더하진 않았다고 감히 증언할 수 있다.

고문은 강제자백을 강요하는 폭력과 모욕이지만 일시적이다. 이에 비해서 학생들에 의한 집단폭력은 동급의 학생이라 더 모욕적이며 더 수치스럽다.

매일 얼굴을 맞대며 1년, 2년을 견뎌내야 하는 일이 장기간에 걸치기 때문에 전율하리만큼 두렵고 무서운 일이다. 그럼에도 학교는 스스로 해결할 것을 은근히 종용한다.

오히려 잘못 건드리면 더 큰 보복이 올까 조마조마해진다. 가해학생들은 이미 짐승이 된지 오래다. 피해학생들은 그들에게 가지고 놀기 좋은 장난감이다. 치고, 차면 돈도 가져온다. 스트레스를 푸는 대상물이다.

이들에게 법이 허용하는 최고의 처벌이 기해지지 않고서는 결코 해결의 방법은 없다. 심신미약도 아니다.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서 남을 괴롭히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의 학교 기생(寄生) 짐승들을 가차 없이 강력하게 처벌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한국정치평론가협회 회장  전  대  열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