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신(權臣)
권 신(權臣)
  • 전주일보
  • 승인 2011.11.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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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권신(權臣)이라 할 만한 자는 오직 국초의 홍윤성(洪允成) 한 사람뿐이다.”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중 ‘광해식체(光海識體)’편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익이 무슨 근거로 홍윤성 한 사람만을 권신으로 지칭했는지 의문이었다. 다만, 분명한 한 가지는 홍윤성이 권신이란 평가를 받는 것에는 이의가 없다는 점이다.

홍윤성은 세조(世祖)의 권신이다. 세조가 비판 받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조카의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세조 입장에서는 할아버지 태종(太宗)과 비교해 자신을 정당화 시킬 충분한 논리와 상황이 있다. 차이가 있다면, 태종 즉위에는 사육신(死六臣)과 같은 걸림돌이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시대의 양심’사육신에 대한 비판 중에는 그들이 너무 명분에 치우쳐 현실을 외면했다는 지적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단종의 비극적 죽음으로까지 이어졌다고 얘기한다. 태종과 세종(世宗)을 아우르는 성군(聖君)이 되고 싶었던 세조에게 한계상황이 오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공신을 숙청함으로써 아들 세종의 손에 피가 묻는 일이 없도록 했던, 태종과 같은 길을 갈 수 없게 되었다. 세조가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다. 그리고 그 정점에 홍윤성이 있다. 세조는 시정잡배 수준의 이 인물을 재상으로 만들어줬다.
홍윤성은 사육신을 비롯한 수많은 희생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사면논의가 있을 때 그 부녀자들을 전리품으로 간주하며 반대했다. 그런 홍윤성이 온갖 불법과 부도덕한 일로 탄핵을 받아도 세조는 그를 비호했다.

심지어 홍윤성이 자신의 숙부를 때려죽여 암매장한 패륜을 숙모가 고발 했을 때조차 분노를 표시하기만 했을 뿐 공신이란 이유로 그를 처벌하지 않았다. 홍윤성은 예종(睿宗) 때 마침내 영의정이 된다.

그리고 그가 죽자 성종(成宗)은 ‘철조(輟朝)·조제(弔祭)·예장(禮葬)하기를 예(例)와 같이 하였다.’고 실록(實錄)은 기록하고 있다.

세조가 뿌린 피가 태종의 그것과 결코 같을 수 없는 이유는 이것 하나 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이익의 시각과는 달리 권신이 홍윤성 한 사람에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익히 알려져 있는 한명회나 신숙주 수준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공신들은 세조 이후에도 계속 양산된다. 그리고 그들은 조선을 자신들의 나라로 만들어버린다. 거기에는 왕도, 백성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공신들의 이해만이 있을 뿐이었다.

폭군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 역시 공신의 그늘에서 예외가 아니다. 중종반정의 최고 주역은 박원종(朴元宗)이다. 그는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손아래 처남이다. 종법(宗法)대로라면 마땅히 왕이 되었어야 할 월산대군이니 그의 누나도 중전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공신들의 이해가 개입했다. 한명회는 사위인 자을산군(者乙山君)을 지지했고 인수대비(仁粹大妃)는 그 거래를 받아들였다.

동생 성종과 형인 월산대군의 우애는 돈독했다. 그리고 박원종은 성종의 충직한 신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즉위 후 상황은 달라진다. 연산군의 황음(荒淫)과 무도함이 백모(伯母)에게 까지 미쳤기 때문이다. 박원종이 반정에 앞장서게 된 가장 큰 이유이다.

그는 더 이상 충직한 신하가 아니었다. 그는 왕을 폐위하고 신왕을 옹립한 절대적 권신이 되었다. 중종은 박원종이 들어오면 편히 앉지도 못했다고 한다. 이제 또 다른 공신의 시대가 된 것이다. 그 공신들은 연산군 시절에도 대부분 권력에 있던 사람들이다.

이익의 시각과는 달리 권신의 문제는 지금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한줌도 안 되는 권력을 가지고 모든 것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권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박원종이 죽자 중종은 그에게 시호를 내리고 홍윤성에 못지않은 예로 장례를 지냈다. 하지만 사관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뇌물이 사방에서 모여들고 남에게 주는 것도 마땅함을 지나쳤다. 연산(燕山)이 쫓겨나자 궁중에서 나온 이름난 창기들을 많이 차지하여 비(婢)를 삼고 별실을 지어 살게 했으며, 거처와 음식이 참람하기가 한도가 없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르게 여기었다.”

/완주군농업기술센터  장  상  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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