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다 월영습지 (月影濕地)
초록바다 월영습지 (月影濕地)
  • 전주일보
  • 승인 2024.07.04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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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종/수필가
백금종/수필가

초록빛 세상이다. 선경은 쉽게 내어주지 않듯 내장산이 깊게 품어 안은 진주 같은 존재이다. 비탈진 오솔길 따라 오를수록 봉우리는 험해지고 계곡은 깊어진다. 주변에는 푸릇푸릇한 수목들이 열병하듯 자리하고 있다. 푸른 생명의 현장이다.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은 바라 본다. 반달같이 보인 하늘에는 흰 구름이 한가롭게 흘러가고 있다. 숲 사이를 헤집고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이 갓 짜낸 주스처럼 청량하다.

계곡에는 맑은 물이 곡예 하듯 흐른다. 가파른 돌바닥은 구르고 모진 돌덩이는 통통 튕기면서 구비 돌아 졸졸 흐른다. 흐르는 물소리가 경쾌하다. 마치 건반 위에 연주되는 스타카토처럼. 세상만사 부대껴 온 심신에 피로가 풀린다.

목을 축이던 다람쥐가 나무 위로 뛰어오른다. 반갑지 않은 내방 객에 깜짝 놀랐을까? 너희에게 해를 끼치러 오지는 않았다만, 순간 방해가 되었다면 미안한 일이다. 비단 다람쥐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생명체에도 마찬가지이리라.

습지에 이르는 가파른 길섶에는 이름 모를 풀꽃들이 다복다복 자라고 있다. 자리를 내어준 수목들의 배려이고 그 사이까지 비집고 드는 초여름 눈 부신 햇살 덕이다. 태양 빛에 거울처럼 투명해진 담록(淡綠)의 신록들, 세월의 열차를 타고 여름으로 달리고 있다. 아직 조금은 연약하나 장대한 꿈은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겠지.

길 따라 걸으며 숲 해설사가 들려주는 풀꽃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다. 이번 기회에 하나라도 뚜렷이 알고픈 작은 욕심에서이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생경한 나무나 풀꽃들이 더 많다. 아니 조금만 관심을 가졌다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을 텐데.

드디어 습지이다. 낮은 산 중턱 분지에 형성되어 있다. 과거 농경지로 사용했던 곳이 주민이 떠나면서 방치되어 자연 습지로 복원된 곳이다.

수목이 어우러져 밀림을 방불케 한다. 이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종류는 찔레꽃, 노루발, 은난초, 정금나무, 뻐꾹나리, 때죽나무, 가막살나무 등이라고 샘플을 보여주며 설명하는 숲 해설사의 열의가 대단하다.

생계형 식물인 머위, 고사리, 참취, 두릅 등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더하여 깃대종인 비단벌레, 진노랑 상사화, 반딧불이 같은 희귀종도 서식하고 있다. 모든 수목이 자기 영역만 고집하지 않고 어우렁더우렁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옛사람들의 모습을 닮은 듯하다.

크다고 거들먹거리지 않고, 작다고 위축되지 않고 자기의 본분을 다하면서 사는 모습이 진정한 자유주의자다. 군데군데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그 흔적들 속에는 기쁨과 슬픔도 깃들어있고, 아름다운 사랑도 이별의 눈물도 기억하고 있지 싶다.

산골짜기에서 얼마 되지 않는 땅덩이에 목숨을 걸고 살았던 가슴 시린 이야기는 이곳 찾는 이들에게 대대로 전해주고 싶겠지. 각자 사연이야 있겠지만, 이곳까지 들어와 살았던 그들은 얼마나 외롭고 고달팠을까?

푹푹 빠지는 다랑논에서 일해야 했던 그분들을 생각하니 아버지의 모진 삶도 스쳐 갔다. 아버지도 습지와 닮은 수렁배미 논에서 평생 허리 펼 날 없이 일했다. 모내기 철이면 쟁기나 경운기는 엄두도 못 내, 손수 파고 골라내야 몇 포기 모를 꽂을 수 있었다.

고단한 몸을 추스르고 나면 보름달은 중천의 미루나무 가지에 걸리었다. 그달은 해맑기보다 안쓰러운 표정이었을 테다. 이곳에 터를 잡았던 사람들이나 아버지 삶이나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였으리라.

습지는 층을 이루며 낮은 곳으로 이어지고 넓은 연못까지 조성되어 있다. 연못은 옛날 그 시절 꼬마들의 놀이터도 되고 빨래터도 되고 아낙들의 스트레스 해방구도 되었겠지. 그러나 이제는 주인 잃은 빈 배 마냥 인적은 간 곳 없고 갖가지 수목만이 제 세상을 만나듯 울울 창창이다.

습지의 이름이 불현듯 생각나 달의 그림자라도 찾을 수 있을까 목을 내밀고 들여다보았으나, 달의 흔적은 고사하고 나무에 가려 낮달의 온기마저 느낄 수 없다. 호젓한 달밤 홀로 올라 거닐면 연못에 비친 외로운 달그림자가 나를 맞아줄까?

망연히 연못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쪽 구석 웅덩이에서 올챙이 떼들이 꼬물거리고 연잎 아래에서는 미꾸라지 새끼가 펄 위로 나서며 나를 반기는 듯 꼬리를 흔든다. 여기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멀지 않은 산자락에서는 뻐꾸기 한 녀석의 청혼가(請婚歌)가 아련하게 밀려온다. 참으로 평화롭고 한적한 산골이다.

지구상에는 수천만 종의 생명체가 있다 한다. 그 여러 종의 동식물이 기후변화나 토양의 황폐로 시나브로 사라지고 있다. 푸르던 아마존의 수림도, 아프리카 동물도, 북극의 얼음도 사라질수록 지구는 몸살 앓고 인간은 각종 재앙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다. 그 원인은 알고 있지만, 쉽사리 대처하지 못하는 현실이 아쉬울 뿐이다.

그런데 이곳은 그런 현상과는 달리 하늘은 맑고 푸르며 공기는 상쾌하고 나무들은 산뜻하게 푸른 옷을 입고 거기에 물까지 풍부하니 온갖 생명이 활개 치며 살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자연도 스스로 정화하고 재생하려는 본성이 있지 싶다. 월영 습지는 인간의 손길이 멀어진 후 자연이 스스로 치유해서 만든 생태 정원이다. 동식물의 보금자리뿐 아니라 인간에게는 휴식할 수 있는 여유까지 준다. 숲과 바람, 물, 산새가 어우러져 함께 숨 쉬며 살아가는 청정한 월영 습지, 누구나 한 번쯤 거닐러 보고픈 초록 바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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