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 인생에는 참한 지우개가 필요하다”
“참한 인생에는 참한 지우개가 필요하다”
  • 전주일보
  • 승인 2024.06.24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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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詩想隨想 - 68

 

 

 

주지승이 땅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리더니 동자승에게 그런다 아랫마을 다녀올 동안 네가 이 동그라미 안에 있으면 밥을 굶길 것이요 밖에 있으면 절에서 내쫓을 것이다

 

시가 보물이라며 심연에 숨기고 제대로 꺼내본 적도 없는 할아비가 초등학생 손주에게 화두를 건다 너라면 굶겠느냐 아니면 쫓겨나겠느냐

 

그러자 손주는 뭐 대수냐는 듯 지구에 그려진 씨줄과 날줄을 지워버리면 그만이라며 의기양양하다

 

요즈음 할아비 학습능력이 부쩍 미심쩍어지는 것은 연필글씨를 고쳐 쓰던 고무지우개가 필통에서 사라지고서다 그러자 없던 금들이 차선처럼 생겨나고 넘어져 깨진 무릎 상처가 악몽처럼 형상 기억하는

 

졸시지우개전문

기억과 망각은 상반되지만 두 가지 모두 인간의 삶에 필요하다.

성장한다는 것은 육체만 커지고 기능만 정밀화해서 다가 아니다. 입력한 밖의 정보를 뇌리에 기억해 두고 중첩해 가면서 몸과 마음이 함께 기능화하는 과정이다. 이때 기억하는 힘은 필수요소다. 인간의 기억은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질량과 기능이 무한대로 확장된다. 그렇게 하도록 제공되는 요소가 기억력이다.

그러나 기억력이 좋다고, 소위 총명[聰明: 영리하고 기억력이 좋으며 재주가 많음]하다고 해서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인간이 잠을 자는 행위는 육체의 피로를 풀고 삶의 에너지를 재충전하기 위한 시간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잠의 기능은 깨어 있을 때 입력한 정보들을 조정하는 데 있다고 한다. 오래 기억할 만한 정보인지, 그냥 망각해도 좋은 정보인지를 잠자는 동안 뇌가 활동하여 분별을 한다.

깨어 잊는 동안 보고色, 느끼고受, 생각하고想, 행하고行, 알게識 된 모든 것을 모조리 기억하려 했다가는 우리의 뇌는 과부하가 걸리고 말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자율신경이 작동하고, 뇌의 신경망들은 쉬지 않고, 우리가 잠자는 동안 스스로 알아서 기억을 조율해 놓는다고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들과, 잊혀도 그만인 것들을 분류하는 작업을 한다.

그래서 망각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잊어버린다고 해서 우리 삶에 하등의 하자를 유발하지 않는 기억은 잊어버려야 건강한 삶이 가능하다. 시시콜콜한 감정의 찌꺼기 같은 것, 버려도 그만인 허섭스레기 같은 것, 기억해 봤자 나를 성가시게 하는 불쾌한 에피소드들… 이런 것들은 빨리, 깨끗이, 완전하게 잊어버리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다.

그래서 “은혜는 바위에 새기고 원한은 물에 새겨라."고 하지 않는가. 잊어버릴 것과 끝내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할 수만 있어도 심신이 건강한, 정신과 육체가 올바른 여생을 보낼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유일하게 확실한 진실은 ‘죽는다’는 것뿐이라고 한다. 그것 말고는 확실한 것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 인생인 모양이다. 나이가 들어 삶의 종착점이 가까워질수록 좀 더 많이 지우고 잊어버리고 싶은데, 자꾸만 옛일이 생각나고, 상처가 새록새록 아픔을 헤집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잊으면 그만인데, 지우면 그만인데…, 주문을 걸고 망각에 기대려 안간힘을 쓰면 쓸수록 또렷한 기억의 포자들이 잠을 앗아가고, 삶의 활력을 떨어뜨린다.

무소유無所有란 아무것도 갖지 않고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란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선택한 맑은 가난에 있다.”[法頂 스님]고 했듯이, 기억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을 기억하려 말고, 적절하게 잊으면서 살아야 한다. 그래서 망각한다는 것은 아무 기억도 갖지 않고 치매 걸린 듯 망연한 상태가 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 삶을 자꾸만 과거에 붙잡아 두려는 기억, 우리의 꿈을 한사코 미래의 불안으로 연장시키려는 기억 등, 우리가 성장하는 데 불필요한 기억들을 지우자는 것이다.

주지 스님이 동자승에게 화두를 던졌다. 막대기로 절 마당에 동그라미를 그리더니, 그러신다. “절 아랫마을에 다녀올 동안 네가 이 동그라미 안에 있으면 밥을 굶길 것이요, 밖에 있으면 절에서 내쫓을 것이다.” 동자승은 난감하다. 선택지는 안팎뿐인데, 자신이 서 있는 곳도 안이 아니면 밖이지 않은가. 도대체 어떤 선택지를 가져야 하는가?

물론 이 화두에 대하여 그런 분별 자체가 있을 수 없음을 전하려는 공안[公案: 선종에서 조사가 수행자를 인도하기 위해 제시하는 과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자승에게는 그보다 절박한 문제가 없다. 밥을 굶느냐, 아니면 절에서 쫓겨나느냐?

고등학생, 중학생, 초등학생인 세 자매에게 현상금을 걸고 똑같은 문제를 냈다. 지혜로운 답을 요구했다. 고등학생은 고급한 머리를 쓰려고 안간힘을 쓴다. 중학생은 난센스 퀴즈라며 엉뚱한 발상 쪽으로 머리를 굴린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뜻밖에 초등학생이 번개처럼 정답이 떠올랐다며 손을 든다. “동그라미를 지워버리면 되잖아요?!”

나만 해도 그렇다. 평생 안팎에 경계선을 긋는 행위를 분별력 있는 삶이라고 여기며 살아온 듯하다. 내 편과 네 편, 유리함과 불리함, 아군과 적군, 고상함과 천박함, 행복과 불행, 유식과 무식 등등 생각해 보면 그렇게 나눴던 경계선이 그 어디에도 없음은 매우 분명하다. 내 자신이 내 삶의 주지승이 되어 내 안에 무수한 동그라미를 그려온 듯하다.

“인생이 삶을 배우는 데도 일생이 걸리지만, 죽음을 배우는 데도 일생이 걸린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Seneca: BC 4경~AD 65]가 한 말이다. 이제 그 마지막 공부를 하려고 작심하니 내 여생의 필통에 그 어느 때보다도 ‘참한 지우개’를 넣어둬야 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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