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렴타지 않는 계절은 오고야 말 것인데”
“무렴타지 않는 계절은 오고야 말 것인데”
  • 전주일보
  • 승인 2024.06.03 13: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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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詩想隨想 - 65

 

 

단풍나무라고 해서

모두 염치를 아는 얼굴은 아니다,

어느 철든 단풍나무는

부끄럽지 않은 계절 없다며

날 때부터 질린 얼굴이다

사과나무들 또한 속셈이야 다르겠지만

사는데 미안할 게 뭐 있느냐며

밀봉한 쾌락을 붉게 매단 채

해님 닮은

둥근 식탐을 만든다

내 얼굴에서

익은 부끄러움이나

떨어지고야 말 쾌락의 흔적을 매단 채

어느 날이나

무렴타지 않아도 좋을,

계절 없는 그날 맞이할 수 있을까

 

졸시나무는 저마다 얼굴이 다르다전문

 

나뭇잎들이 싱그럽게 피어나는 5월이 지나자, 제 모습 제대로 만들어가겠다며, 녹색 물결이 6월 천지에 가득하다. 숲을 거닐며, 혹은 갖가지 나무들이 지천인 공원 벤치에 앉아 나뭇잎들을 물끄러미 관찰하노라니, 신기한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나뭇잎들은 저마다 저렇게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을까? 똑같은 나뭇잎을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

 

나무 종류에 따라 나뭇잎의 모양이 다른 것도 신기한 일이다. 그중 가까이 손만 뻗으면 닿는 단풍나무 잎의 모양새는 볼수록 신기하다. 여린 튤립이 피어나기 전의 모습을 한 단풍나무가 있는가 하면, 네 손가락을 활짝 펴든 채 지상의 별이라도 되겠다는 단풍잎도 있다. 어느 단풍나무는 공작의 깃처럼 기다란 줄기에 어긋나는 잎들을 매달고 있기도 하다.

 

단풍나무뿐이 아니다. 아카시아 나뭇잎은 왜 그들을 한다/안한다청춘남녀가 벌이는 가위 바위 보, 사랑 게임 숫자 놀이판이 되게 하는지, 혹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는 무료함의 심심풀이 놀이가 되게 하는지? 침엽수네 활엽수네 하는 단순한 구별을 넘어서, 나뭇잎들의 모양새를 살펴보노라면, 모든 생물은 역시 자신이 오래 생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뭇잎의 모양새를 보고 찰스 다윈은 진화의 원리를 발견해 냈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뭇잎들을 살펴보면 그 원리가 적중함을 엿볼 수 있다. 다윈의 진화 원리 중 자연 선택설에 의하면 생물은 살아남을 수 있는 수보다 더 많은 자손을 생산한다고 했다. 단풍나무는 프로펠러 날개 같은 씨앗을 이파리마다 달고 있다. 씨앗이 익으면 바람을 타고 어디든 날아가지 못할 곳이 없다. 그 숫자는 또한 얼마나 많은지, 한 그루의 나무에서 수많은 씨앗이 천지사방으로 날아가 퍼뜨릴 또 다른 단풍나무를 생각하면 아득하다.

 

단풍나무는 처음에는 녹색이었다가, 가을이 되면 빨간색으로 물든다. 그래서 단풍나무라는 이름을 얻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러나 어떤 단풍나무는 아예 어려서부터 빨간색으로 치장한 채 피어나기도 한다. 가을이 되어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가을 서리를 온몸으로 감당한다. ‘물들지 않은 단풍나무라면, 이 나무의 이름을 바꿔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처음부터 빨갛게 단풍든 단풍나무는 후천적 변이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닌지? “환경에 적응한 변이를 가진 개체들이 경쟁에서 더 잘 살아남고 더 많은 자손을 남긴다는 진화의 원리에 의하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예 태어날 때부터 단풍이 들어서 나온 단풍나무들이, 가을이 되어서야 얼굴 색깔을 바꾸는 그것들보다 더 잘 살아남고, 후손도 더 많이 남길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진화의 원리가 인간 사회에도 적용되는 것은 아닌지, 난감할 때도 있다. 사람들은 염치없는 짓을 하면 얼굴색부터 바뀐다. 얼굴이 홍당무 색으로 변하는 것이 꼭 과오나 허물 때문만은 아니지만, 내심 부끄러움을 느낄 때도 그렇게 반응한다. 그래도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내면 반응을 통해서 최소한 변질하지 말아야 할 삶의 원리같은 것을 스스로 점감하려는 기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살아오면서 부끄러움도 많이 겪었지만, 무엇보다 사과해야 할 일들도 적지 않았다. 교직에 몸담았던 내력으로 보아 그렇다. 교사는 교과서에 있는 지식만 가르친다고 끝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소중한 역할이 학생들의 인성함양에 더 많은 지혜를 발휘해야 하는 것이 교사[선생]이라는 직업이다. 그런데 그 많은 훈육과 선도, 그리고 모범과 수범을 보여야 가능한 경우에도 그렇지 못한 점에 대해서 솔직하게 사과하지 못한 경우가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른이요, 선생이요, 지도자라는 허접한 권위의식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벌써 오래전 일이지만,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담임이었던 때, 산골 가난한 집안 22녀 맏딸이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졸업 후 직업전선에 나서느냐, 아니면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대학에 진학하느냐로 학부모 상담을 했다. 한 학년이 불과 3학급이었지만, 전교 1,2등을 다투는 재원이라서 인문계고 진학을 적극 권했다. 그렇지만 학부모는 빈곤한 가정 형편과 동생들의 학업도 고려해서 당연히 실업계를 원했다. 도시에서 자취방 하나 구할 형편이 되지 못했던 그 학생은 담임의 권유로 인문계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렇지만 그 뒤 이어지는 학업 생활의 궁핍함을 전해 들을 때마다, 참으로 못 할 짓을 한 것은 아닌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먹먹하다. 그래도 그 학생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한 적이 없다. 그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느니, 눈물 젖은 빵을 먹어봐야 인생을 제대로 논할 수 있다느니, 씨도 안 먹힐 말로 위로랍시고 그를 달랬던 기억이 새롭다.

 

시문학을 필생의 업으로 선택한 일도 나를 꽤나 부끄럽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글로 쓰는 만큼, 시로 느끼는 것만큼, 현실에서 나를 허물지 못하고 항상 햇볕 좋은 양지만을 골라 가지를 뻗으려 한 것은 아닌지, 나의 졸시들을 대할 때마다 무렴하기만 하다.

 

그렇지만, 이렇게 무렴 타는 날들이 언제까지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뭇잎들의 얼굴이 모두 다르듯이 사람마다 다르게 타고난 성정일지라도, 가을 서리 한 번이면 충분한 계절, 그날이 오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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