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 트라우마
비상계엄 트라우마
  • 전주일보
  • 승인 2024.12.10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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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기 천년한지포럼 대표
김정기 (사)천년전주한지포럼 대표

 “수술한 데 어때?” 12월 4일 아침. 친구 전화다. “밤새 한숨도 못 잤지. 미친X 하나가 5천만 국민 잠을 설치게 하고 술 퍼먹고 자나?” “내년 대학에서 퇴직하면 애들이 있는 캐나다로 가야 하려나∼” “싫다 싫어, 우리하고 같은 X이잖아” 친구와 윤석열은 공교롭게도 동시대 박정희의 ‘10월 유신’을 겪은 79학번(대입년도)이다. 윤석열은 전날 밤 시계를 45년 전으로 되돌렸다.

전두환 신군부는 1980. 5. 18. 0시. ‘서울의 봄’ 당시 국정 혼란을 빙자해 비상계엄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했다. 우리 현대사 비극의 시작점이다. 80년 당시, 신학생이던 형님이 자췻집에 왔다. 형님 손에 이끌려 고향 집으로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 정읍 북면 구간. 유사시 활주로로 넓게 만든 도로에 군용트럭 수십 대가 줄지어 있다. (80년 광주에 시위 진압하러 가던 공수부대였다)

/전두환은 물러가라 훌라∼ 훌라∼/ 같이 죽고 같이 살자 훌라∼ 훌라∼/ 
‘훌라송’을 부르며 친구들과 고향 바다 갯벌에서 스크럼을 하고 못다 한 구호를 외쳤다. 신군부는 5.18을 계기로 전국 대학가에 휴교령을 내렸다. 경찰은 시외버스 중간 검문소에서 젊은 20대는 주민증을 보자며 검문했다. 어설퍼 보이는 사람은 무조건 데리고 갔다.

“관내 대학생에게 알립니다. 오늘 00시까지 지서(지금 파출소)로 나와 신고하세요. 다시 한번 알립니다 ∼” 이렇게 고향 친구 6명은 이유도 모르고 지서에 불려가 “나라가 시끄러우니 우리 면의 대학생들은 얌전히, 조용히 하라”는 경고와 함께, 일과를 보고해야 했다. 어수선한 광주의 소식과 함께, 그해 여름은 무지하게 길고 더웠다. 

5개월 후, 9월 말. 한참 늦은 복교령으로 1학기를 다 까먹고 대학에 돌아왔다. 80년 대학 2학년은 군부의 서슬에 놀라, 대학이 공포에 숨을 죽였다. 10월 유신 때의 ‘학도호국단’이 다시 만들어졌다. 교수들이 해직됐다. 목사와 스님, 신부님. 사람들이 무수히 끌려 나갔다. 온 나라가 고문을 당했다.

“옆집 00이를 군인들이 데꼬 갔단다” 어머니의 전갈이다. 다른 것 신경쓰지 말라는 부탁이다. 전두환은 동네에서 어영부영 놀던 청년들도, 길거리 거지들도, 술 마시고 싸운 사람도, 심지어 고등학교에서 좀 껄렁거리던 아이들도 삼청교육대로 무조건 끌고 갔다. 군부의 비상계엄은 공포 분위기로 세상을 몰고 갔다. 

1979년 부마항쟁은 계엄을 불러왔고,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을 가져왔다. 80년 봄. 대한민국은 민주화 요구로 뜨거웠다. 군부는 3김으로 불리던 김영삼·김대중·김종필을 가두고, 결국에는 김대중에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렇지만 우리 국민은 공포의 ‘계엄 트라우마’를 분연히 떨쳐냈다.

군 제대 후, 84년 봄학기. 3학년으로 복학한 대학가는 술렁였다. 대학마다 스스로 학원자율화 추진위가 결성되고 중단된 18대 총학생회가 부활하기 시작했다. 서강대를 시작으로 서울대·전남대·전북대 등 전국의 대학들이 총학을 구성했다. 대학가에 매직이나 싸인펜으로 눌러 쓴 대자보가 나붙기 시작했다. 자고 나면 대자보 천지였다.

광주학살의 책임을 묻는 대학생 미문화원 점거 사건으로 한국인들의 미국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가난한 나라에 밀가루와 먹거리를 주던 ‘천사 미국’이 아니었다. 광주 학살자 전두환을 방조한 ‘제국주의 미국’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먼저 종교계와 시민단체들이 시작했다. 시국을 논했다. 끝내 독재와 싸웠다.

시위 중 연세대생 이한열은 주검으로. 서울대생 박종철은 고문으로 젊은 생을 마쳐야 했다. 앞서 전북대생 입학 동기 이세종은 군인들의 군홧발로... 또 일터와 거리에서 노동자들은 분신으로 무도한 정권에 항거했다. 퇴행하던 역사는 깨어있는 시민들에 의해 한 걸음 한 걸음, 더디지만 눈부시게 오늘의 ‘선진국 대한민국’으로 끌어 올렸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서 보듯이 대통령 탄핵은 대한민국 체제 탄핵과 붕괴로 이어진다.(중략) 윤석열 대통령 개인을 지키기 위한 게 아니다. 대한민국 체제와 후손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 탄핵에 반대하는 것이다.” 국민의힘 5선 중진 윤상현 의원이다. ‘탄핵 트라우마’가 두렵다는 것이다. 궤변이다.

트라우마(trauma). 재해를 당한 뒤에 생기는 비정상적인 심리적 반응이다. 국힘 중진의원들은 2016년 박근혜 탄핵 후 자신들의 기득권이 무너지고, 민주당에 정권도 뺏긴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라보다 정권이다. “탄핵 트라우마가 계엄 트라우마보다 심한가?”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은 탄핵 부결 직후 국힘을 향해 일갈했다.

민주당 진성준 의원. “국민의힘 의원들이 무슨 ‘탄핵 트라우마’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 국민이 겪은 ‘비상계엄 트라우마’는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까? 자기들 권력 잃을 것이 걱정되고 국민이 비상계엄을 통해서 기본권이 억눌리고 학살을 당한 그 트라우마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정말 그런 적반하장도 없습니다.”

추신: 정신과 의사협회는 국민에게 ‘계엄 트라우마’를 안긴 ‘전공의 처단한다-윤석열’을 5천만의 이름으로 꼭 고발하라.

 

#김정기(前 KBS전주 편성제작국장). PD. 1994년 다큐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시작으로 ‘무주촌 사람들’ ‘키르기즈 아리랑’을 만들었다. ‘지역문화’와 ‘한민족 디아스포라’에 관심이 많다. 전북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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