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은 이별기념품을 모은 앨범 한 권”
“내 몸은 이별기념품을 모은 앨범 한 권”
  • 전주일보
  • 승인 2024.05.20 12: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상수상詩想隨想 - 63

 

 

 

명언록엔 아직 빛을 발하는 이별도 있다 사랑하므로 헤어지노매라 가시리 지적소유권이 여즉 시퍼렇고 아리랑 후손들도 세우지 못한 눈물의 박물을 역사하다니

 

뜨거운 기쁨의 눈물도

차가운 슬픔의 눈물도

한강을 이루고 황하를 이루었으니

하긴, 눈물도 모으면 실패의 박물이 될 것인데

 

헤어짐을 수집합니다엉뚱해서 오히려 당연한 실연을 모아 성공을 세우자면 아프지 않은 슬픔도 없고 즐겁지 않은 기쁨도 없어지지 않을까, 그러지 않을까?

 

동화처럼 사랑하고 행복하다가

실화처럼 찢어지고 불행하다가

다시, 또 다시 늦은 동화로 돌아갈 수 있기만 해도

행복동네와 불행마을이 이웃할 수 있긴 있을 것인데

 

실연이 실패가 아닌 박물관 유리상자에 간직하는 게 반드시 잊자는 것이 아닌 터 내 실연의 기념물을 보내자니 넘길 때마다 비명을 지르는, 내 몸 낡은 앨범 한 권만이 발버둥을 치는구나

 

*한 때 연인이었던 크로아티아의 드라젠 그루비시치(47)와 영화 프로듀서 울링 카비스티카는 <실연박물관-Museum of Broken Relationship>을 제주도 아라리뮤지엄에서 기획 전시했다.(‘16.05)

 

졸시실연박물관*전문


 

호사가라지만, 인간의 역사는 그들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저런 발상이 꽃을 피울 수 있을까? “헤어짐을 수집합니다라는 광고 문구를 봤을 때, 나는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찢어진 것을 붙여드립니다” “흩어진 것을 모아드립니다” “잊힌 것을 되살려 드립니다……, 그래도 그 참신한 발상에 오래 머물렀다.

이를 기획하고 전시해서 이별박물관을 세우려는 두 사람도 한때 사랑했으나, 지금은 남남이 된 처지라고 한다. 그런 그들이 다시 의기투합하여 이런 기발한 아이디어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이별의 박물관을 세우는 것 자체가 다시 붙인 것-모은 것-되살린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저들의 발상이 낯설지는 않지만, 한 번쯤 삶의 전후를 되돌아볼 단초가 되리라는 생각에 미소가 머물렀다.

우리 삶은 관계의 다른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계를 인연이란 말로 달리 부를 수도 있겠지만, 관계[인연]을 맺고 그 관계를 청산하고, 다시 인연[관계]를 맺고 그 인연이 끊어지기를 반복하는 과정이 곧 삶이다. 그러나 우주의 본질, 자연의 됨됨이가 그렇듯이, 인간의 삶, 유기체의 속성이 그러하듯이,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 말고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면 헤어짐, 이별, 관계 청산, 인연의 끊어짐이 반드시 실패요, 슬픔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별박물관>의 발상의 근저도 그럴 것이다. 어릴 때부터 동화나라는 언제나 행복한 삶이 불행을 만났다가 다시 행복을 복구하는 순환구조를 가진다. 그런 동화를 접하면서 우리는 이별은 불행한 것이라는 교훈을 몸에 새겨왔던 전력이 있다. 그러나 이별 없는 삶이 없다면,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의 이별도 시간의 마모 속에서 아름다운 추억으로 환원될 수 있어 인생이 아닌가, 역발상은 언제나 참신한 생각에 등불을 밝힌다.

지난 5월이 시작되는 무렵 구순을 넘기신 형님과 칠순의 막바지를 오르는 아우 내외, 그리고 필자 내외가 함께 나들이를 했다. 아들 조카들이 마련한 5월 효도 여행 덕분이었다, 잘 가꿔진 숲에 마련된 펜션에서 12일을 보냈다. 신록이 무르익어가는 무성한 숲을 거닐면서, 그리고 상쾌하기 그지없는 환경 속에서 형제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천국에 입장하기 위해 리허설을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공유하였다.

저녁 시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젊은 시절이라면 모처럼 의식의 허리띠를 풀어 밤새워 술타령을 할 만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심신에 그려진 나이테가 그럴 수 없음을 말렸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시답잖은(?) 이야깃거리로 시간의 중방을 허물 수밖에 없었다. 형님께서 먼저 질문을 던지셨다. “동생, 과연 인연의 끝이 어디일까?” 평소에도, 아니 구순 기념 모임을 가지신 두어 해 전부터 부쩍 잦아지는 질문이시다.

그렇잖아도 요즈음에는 읽은 책 다시 읽기를 시도하는 참이었다. 서가에 꽂힌, 지난 시절 읽은 책 중에서 다시 한 번 더 찾아보고 싶은 책들에 손길이 간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오래된 선지식善知識을 만나는 것처럼 반갑기 그지없다. 지적 호기심이 재충전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 중에 <반야심경>이 있다.

반야심경의 핵심은 공사상空思想이다. 인간을 포함한 일체 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것.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다른 사물들과 서로 얽혀 있는 관계 속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존재라는 것. 그 모양이나 형태, 또는 그 성질이 전혀 변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모든 사물들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 얽혀 서로 의존하는 관계에 있을 뿐이라는 것. 그래서 스스로의 자아가 없어 무아無我라 하며, 자아自我가 없는 무아이기에 공이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형님께서 그러신다. “허 참, 인생이 그렇게 허무하단 말인가!” 그래서 한 말씀을 더 드렸다. “세존께서는 자신도, 자신의 말씀도 공하다 하셨는데, 어찌 허무 따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저 삶의 끝이 좋은 원인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게 바로 해탈解脫이요, 그랬을 때 이를 수 있는 길이 바로 열반涅槃이라 합니다.”

그나저나 내 이별의 기념품을 모아 <이별박물관>에 보내려니, 결국은 낡고 헤져 잘못 넘기면 찢어지고야 말, 추억이 오롯이 담긴 앨범[] 한 권뿐임을 발견하고야 만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