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건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시간을 건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 김규원
  • 승인 2023.11.27 11: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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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詩想隨想 -41

 

시인들이 함께

가을 문을 닫으러 가자하여

한 발 걸쳤다.

 

한글박물관에서 나무활자를 만났는데

죽자 사자 나를 새긴 세월이

미라로 거기 있을 줄이야

 

돋을새김 오목새김으로 걸러내느라

문드러진 시의 숨결인 양

빛에 가린 어둠인 채

 

사네 못 사네 불온한 시절어둠에

칼질하던 손길,

죽은 삶으로 거기 있을 줄이야

 

-졸시나무활자전문

서울공화국이 된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것’-이 말은 과장적 수식어가 아니다. 한 나라-물론 대한민국이다. 한 국가의 모든 것이 한 곳에 몰려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런데 그 인정은 그냥 생각만 그럴 뿐이지 실상은 한 곳=서울에 몰려 있어도 상관없다는 태도요 선택이다. 그런 판에 서울 주변의 도시를 서울로 편입시키겠다는 집권당의 발상으로 나라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그러자 그냥 온 나라를 서울로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비아냥대는 일이 코미디 아닌 코미디로 인구에 회자된다.

 

그저 힘 센 자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나라의 근간을 흔들고 뒤집으며 마음대로 주물러대는 것을 방관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니 어쩔 도리가 없긴 하다. 왜냐하면 그런 망국의 정책을 내세워도 그들을 지지하는 자들이 만만치 않으며, 그들의 지지로 다시 그들이 권력을 잡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치놀음을 수수방관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정치놀음에 놀아나는 민심의 현주소가 절망스럽기만 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불만스러운 것은 각종 사람다운 삶을 지향하도록 마련된 시설과 기관들, 사람살이의 근간이 되는 생산 시설과 일자리들, 그리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환경과 최첨단 혜택들이 서울에 몰려 있는 것은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다. 역사-문화-예술-교육 등 굵직한 시설이나 기회는 온통 서울천지다. 가히 서울공화국이다.

 

인구의 절반이 서울-경기지방에 몰려 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런 이들에게 균형발전을 위한 양보나, 미래 세대를 위한 배려나, 소외되고 쇠락해 가는 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자신들의 것과는 별개의 것으로 여길 것이다.

 

얼마 전에 문인들과 함께 서울나들이를 했다. <국립중앙박물관><국립한글박물관>을 관람했다. 그 규모가 실로 웅장하고 장대하였다. 그러나 두 기관이 지닌, 국가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막중한 상징성으로 보아, 그만은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립한글박물관>에는 한글 창제의 깊은 뜻과 그 실상이 잘 전시되고 설명되어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밝힌 “(세종)어제서문의 내용을 따라가면서 한글 창제의 내용을 알기 쉽게,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다양한 방법으로 보여주고 설명해 주었다. 시인들과 동행하면서,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문화재이자 자랑거리로, 한겨레를 상징할 수 있는 가장 뚜렷한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모두가 한글을 꼽으며 크게 공감하였다.

 

그 전시물 중에는 세종 당시에 활용되었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에서 필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나무로 만든 옛 활자였다. 오랜 세월을 거쳐 오면서, 얼마나 많은 서책들을 펴냈는지, 모서리가 두루뭉술하게 마모된 나무[]활자들에 눈길이 갔다.

 

나무활자는 금속활자에 비해 여러 가지 단점들이 있다. 금속활자보다 만들기는 쉬울지 몰라도 그 수명이 길지 않다는 것, 몇 회 반복해서 쓰다보면 글자 모서리가 닳아서 선명한 자체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 등 제한적으로 사용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나서, 새 문자가 과연 실용 가능한 것인지 실험하기 위해 펴낸 서책들이 나무활자였다.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용비어천가등 시대를 뛰어넘어 한글의 실용을 여실히 보여주었던 간행물들이 바로 이 나무활자로 인쇄된 것들이다. 그런 나무활자들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느끼는 감회는 실로 가슴이 벅찼다.

 

마치 오랜 세월을 버텨온 나무활자들이 미라mirra로 보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문화의 창조정신과 그 땀방울들이 어찌 세월을 거치면서 쉽게 썩어 없어질 수 있겠는가. <팔만대장경>[정식명칭: ‘해인사대장경판혹은 재조대장경’]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우리 겨레의 뛰어난 창조 정신과 문화의 저력을 보여주어 뜻 깊은 일이다. 그 기록 역시 목판본-나무활자의 위력과 선인들이 간직했던 슬기로움과 창조 정신이 오롯이 담겨진 증거다.

 

나무활자는 돋을새김[양각]과 오목새김[음각]의 기법으로 만들어진다. 활자공이 나무에 한 글자 한 글자 새김을 하는 모습이, 시인이 한 편의 시를 만나는 일과 겹쳐 보였다. 시인은 가슴에 시상의 씨앗을 두고 돋을새김을 하거나, 아니면 오목새김을 하면서 가늠하고 뜸 들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생각이 숙성과 발효의 과정을 거쳐 시가 운율을 얻어 호흡하게 되고, 시가 이미지를 만나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더해진 시의 모습은 빛에 가린 어둠을 새겨내는 일과 다르지 않다. 마치 인쇄물을 토해내고 어둠에 묻혀 세월 앞에서 드러낸 나무활자의 모습이다.

 

우리 삶이 어렵고 고될지라도, 우리 목숨이 어둠에서 왔을지라도, 기어이 빛을 향해 영원을 가고자 한다. 나무활자로 돋을새김-오목새김을 한 한 편의 시도 그렇게 죽은 듯 살아서 빛을 향해 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간을 건너가는 힘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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