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투표하지 않겠다, 백지 자기앞수표 앞에서 떨리는 손길로
고소공포증이 없는 빗방울 그 몸 위에 그 맘으로 잡은 손 가을비, 저 악착!
부끄럽지 않은 식욕 때문에 섣불리 투신하진 않겠다, 숨죽인 나무로 헐벗은 겨울 동안
-졸시「낙엽」전문 |
낙엽, 그 무성하던 나뭇잎들이 계절의 변화 앞에서 무력하게 널브러져 나가떨어진다. “이렇게도 많았던가?” 나무에 붙어 있을 때는 몰랐던 엄청난 나뭇잎의 질량에 압도되는 느낌이다. 하긴 이깟 나뭇잎이야 바람 한 번 불면 모두가 날아가 버릴 ‘가벼움’일 뿐이다.
이 가벼움이 어찌 나뭇잎뿐이랴! 한 사람을, 더 많은 사람을 단 한 방에 날려버리는 악담惡談과 독설毒舌도 나뭇잎 못지않은 가벼움이다. 내 존재의 가장 은밀한 곳[가정]에도, 가장 올바른 가르침의 장소[학교]에서도, 자유로운 사람을 부자유하게 통제하는 곳[관청]에서도, 그리고 사람살이에 가장 긴요한 재화가 유통하는 곳[시장]에서도 가벼운 ‘풍설’은 가을바람에 날아갈 뿐이다. 그것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힘은 결국 ‘시간의 법칙’뿐이다.
길가에 떨어진 나뭇잎에 가을비가 촉촉이 내렸다. 아무리 비질을 해도 바닥에 철썩 눌어붙어 안간힘으로 버텨내는 나뭇잎을 떼어내기가 쉽지 않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은 저마다 부여받은 저 악착! 생존의지 하나로 목숨을 버텨낸다. 그런 생존의지가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리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타령이 가을바람에 낙엽 지는 소리처럼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정말 좋은 나라를 보여주기 싫어서 겉만 좋은 나라를 보여주는 소리, 정말 잘 사는 나라를 보여주지 않으려 풍향계가 가리키는 방향은 황색 자가발전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말 좋은 나라를 보여 일부만 잘 사는 나라를 보여주는 그림, 정신도 잘 사는 나라를 보여주지 않으려 몸만 잘 사는 나라를 보여주는 환상, 이런 황색소음이 비정상을 정상으로 착각하게 한다.
<안전한 세상을 꿈꾸는 안전몽>의 발표에 의하면 2022년 한 해에만 산업현장에서 안전사고로 64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삶의 희망을 안고 산업현장으로 출근한 그만큼의 산업근로자들이 출근했던 집으로 퇴근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도 한 가정의 아들이요 딸이었을 터인데, 가족을 잃은 가족의 슬픔을 짐작이나마 할 수 있을까? ‘중대재해법’이 시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망사고는 듣는 이의 눈과 귀를 의심케 한다. 산업재해 근로자들의 유형별 사망사고의 원인은 대부분 “떨어짐-끼임-부딪침-물체에 맞음-깔림․ 뒤집힘”의 순으로 발생한다고 한다.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안전설비가 미흡하고, 안전의식이 철저하지 못한 상황에서 발생한 사고임이 분명하다.
이러고도 “우리나라 좋은 나라”를 주구장창 왜장칠 수 있을까? 기업의 이익을 위하여, 자본의 생산성을 위하여 근로자들의 목숨을 가을비에 떨어지는 낙엽보다 헐값으로 여기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문명국가요,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설레발을 치는 입으로, 기본적인 안전수칙마저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외면한 채 좋은 나라는 헛구호에 불과하다.
가을비가 내렸다. 앞길에, 길모퉁이 여기저기에 떨어진 낙엽에 가을비가 내렸다. 빗자루로 쓸어보려 하지만 쉽지가 않다. 가을비에 몸을 적신 낙엽들이 한사코 눌어붙어 있어 여간 힘이 들지 않는다. 낙엽도 휩쓸려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한다.
가을비에 몸을 적신 채 휩쓸려가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게 어디 낙엽뿐이겠는가. 고층 산업현장에서 떨어진 근로자가 내 자식이라면, 산업기계에 끼인 노동자가 내 형제라면, 무거운 물체에 부딪친 근로자가 내 친구라면, 물체에 맞고 깔리고 뒤집혀 목숨을 잃은 노동자가 나의 가족이라도 이렇게 무심할 수 있을까?
법-중대재해법이 문제가 아니다. 법 이전에 사람의 목숨을 그 무엇보다도 귀히 여기려는 정신의 결핍이 문제다. 사람 목숨마저도 돈으로 환산하면 값을 치루면 그만이라는 냉혈적 사고, 황금만능주의가 초래한 처참한 현실이다. 이런 몰양심적이고 비인간적인 사고방식이 만연한 나라가 어찌 좋은 나라일 수 있겠는가.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런 현실을 초래한 것은 ‘남탓’ 할 일이 아니다. 그래도 점진적이나마 인간을 존중하려는 정책 입안자들에게 힘을 실어주지 못한 ‘내탓’일 뿐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분단의 현실에서 공공연히 대결과 반목을 부추겨 전쟁마저 불사하려는 세력이 등장한 것도 ‘남탓’ 할 일이 아니다. 그래도 시간이 조금 더 걸리고 비용이 더 들더라도 화해와 공존을 통한 평화의 길을 제창한 세력에 힘을 실어주지 못한 ‘내탓’일 뿐이다.
생존욕구는 유기체의 양보할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이다. 지상에서 목숨을 지탱하고 있는 자의 ‘목숨값’은 귀천-경중-대소를 가릴 수 없다. 모두 똑같다. 미물이라고 여기는 미생물에서 짐승까지도, 피아彼我를 가릴 것 없이, 그들이 없으면 내가 있을 수 없다. 단순하면서도 소중한 자연의 법칙이자 섭리인 이 원리를 외면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희망은 있다.
헐벗은 나무[裸木]이라고 해서 목숨이 다한 것은 아니다. 이 혹독한 계절-겨울을 잠시 숨을 죽이고 지켜볼 뿐이다. 가을비에 온몸을 적시고, 한사코 휩쓸려가지 않으려는 낙엽처럼, 생명의 끈질김으로 버텨야 한다. 함부로 희망을 놓을 일이 아니다. 낙엽이 지는 이유는 겨울을 절망해서 투신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발치를 겨울로부터 지켜내려는 자발적 헌신이다. 낙엽이 지면 봄도 멀지 않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