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십령 고개 넘어 달리던 버스도 숨이 찬지 쇳소리를 낸다. 길옆에 드리운 녹음이 그 소리를 거두어들이니 그나마 조금 잦아진다. 마지막 잿길을 힘겹게 넘었다. 눈앞에 긴 계곡이 나타났다. 화림동천花林洞川이다. 남 덕유산에서 날개를 뻗어 남으로 이어진 물줄기이다. 구름도 쉬어가고 산새도 잠시 날개를 접는 산간오지다.
화림동 계곡은 골이 깊고 물의 흐름이 빠르다. 청량하고 풍부한 물줄기는 계곡을 이리저리 감아 돌면서 곡예를 한다. 너럭바위를 유연하게 타고 넘기도 하고, 굽이치고 휘돌면서 초록빛 산천을 깨운다. 규모는 비록 작으나 깎아 지른 듯 수직 바위 아래에는 간간이 소(沼)까지 이룬다. 적요하기 그지없는 승경 속에서 한순간도 멎음 없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물의 조화는 누구의 작품인가? 옛 선비들이 매료되었을 만큼 산자 수려하다.
울창한 수림 사이로 바위 위에 서 있는 정자들은 선비들의 모습만큼이나 단아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자연과 인간이 함께 꾸며낸 한 폭의 선경이지 싶다. 함양은 정자 문화의 메카라고 한다. 그에 걸맞게 여덟 개의 정자와 여덟 개의 못이 있다. 팔정 팔담(八亭八潭)이라 한다. 그들 중 비교적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면서, 주변 경치 또한 다른 곳에 비해 명승인 정자로는 거연정(居然亭)이 으뜸이다.
거연(居然)이란 주자의 정사잡연(精舍雜然) 12수 중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에서 유래한 말이라 한다. 산수가 아름다운 곳에 정자를 짓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말한다. 옛 선비들은 어떻게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살았을까? 그들이라 해서 학문만 닦던 모습이 전부는 아니었을 테다. 여름에는 계곡을 찾아 더위를 식히고 그 속에서 시와 서를 주고받으며 음풍영월(吟風詠月)을 즐겼을 것이다. 때로는 기녀들과 함께 산천을 유람하며 풍류를 즐겼을지 누가 알까?
함양은 선비의 고장이기도 하다. 안동과 쌍벽을 이룰 정도이다. 그 간 안동에 대해서는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었던 것에 비해 함양에 대해 무지했던 것이 사실이다. 실은 함양에 오래된 친구가 있다. 50여 년 전 그 친구의 결혼식 참여차 일찍이 함양을 방문한 적도 있다. 그 시절에는 교통이 불편하여 땅거미가 짙어져서야 함양에 도착했다. 특히 폭설로 뒤덮인 60령 고개를 넘을 때는 고생 좀 했지만, 그 순백의 산정은 나의 거친 감성을 정화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겨우 도착한 함양의 밤 풍경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밤에 오른 화장실에는 밑에서 돼지가 우글거렸다. 그 돼지를 잡아 진수성찬을 마련했다니 삼킨 음식들을 토악질할 정도였다. 이처럼 문화가 낙후된 지역으로 알고 있었는데 문향이 풍기는 선비의 고장이라니?
거연정 난간에 앉아 정자에 내 걸린 편액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정성으로 한 자 한 자 써 놓은 시문이다. 화림동천의 청정한 산수와 거연정의 경관에 대해서 읊어 놓은 듯싶다. 그러나 나의 단문으로는 어느 것 하나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답답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 때 문득 어느 강좌에서 들었던, 그러나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 선생의 시 한 수가 문득 떠 올랐다, 역시 화림동천의 풍광을 읊은 시였다.
푸른 봉우리는 깎아 세운 듯
물빛은 쪽빛인 듯
많이 가지고,
많이 간직해도
이는 탐욕이 아니리?
이를 쫓으면서 어찌
세상 事를 이야기하는가?
산 이야기 물 이야기
이야깃거리 많은데……
(碧峰 高挿 水如藍)
(多取多藏 不是貪)
(捫蝨何須談世事)
(談山談水亦多談)
아무리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살더라도 많이 가지고 있어도, 가지려 해도 탐욕일진대 이를 좇으면서 어찌 깨끗하게 산다 할 수 있으리? 탐욕도 명예도 버리고 산과 물과 교감하며 우직하고 깨끗하게 살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과 벗하면서 사는 모습 아닌가?
나의 내면을 맑은 물에 비추어 보았다. 어떤 자세로 살아왔는지 내가 보였다. 버려야 할 것을 쉽게 내려놓지 못하고 몸부림쳤던 일들은 얼마나 많았던가? 자연 섭리를 거니 채지 못하고 우매하게 살았던 시절은 얼마나 길었고? 물소리 바람 소리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음을 오늘 알았다. 산은 언제나 거기 있는 듯하나 4계의 변화를 통해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았다 생의 고단한 가풀막을 오르내릴 때 뛰어오르는 연어처럼 도약한다는 것도 가늠했다
천방지축(天方地軸) 날뛰며 허욕만 가득했던 삶이었다. 이제야 돌아보니 무욕(無慾), 자애(慈愛)의 석가여래 말씀이 죽비처럼 내리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