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반가운 소식이 왔다. 코로나19로 중단 된지 3년 만에 ‘2022년도 한국스카우트 전북연맹 송년회’를 갖는다는 문자가 손전화기에 뜬 거다.
그렇지 않아도 ‘제25회 새만금 세계잼버리’를 7개월 남짓 앞둔 터라 아쉬운 생각이 들었었다. 서둘러 ‘전북원로스카우트’ 회원들께 송년 행사를 알렸다.
그러자 회원 가운데서 유독 나를 끔찍이 아끼며, 후배들로부터도 존경받아온 L 원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문 총무님, 아무래도 마지막일 듯싶어 참석하렵니다.”라고 했다.
1년 가까이 노환을 겪고 있어서 만류하려다 말고 “제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하고 답을 드렸더니, 택시로 오겠다는 걸 가까스로 설득해 약속을 받았다.
12월 15일 오후다. 구순인데다 노환도 겹쳐 혼자서는 벅찰 듯싶어 동료 C에 도움을 청했더니, 흔쾌히 승낙해줘 평화동 자택으로 함께 모시러 갔다. 거동이 불편한 게 확연하여 조심스럽긴 해도 ‘참 잘했다’는 생각으로 자부심이 일었다.
지난 40여 년 동안 선배가 내게 베풀어준 호의에 비하면, 아주 작은 일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또한 최고 원로로 올해 103세 되시는 Y 원로까지 함께 모시고 예정된 시각에 맞춰 식장에 도착했다.
행사장엔 먼저 오신 원로도 몇 분 있어서 모처럼 성대한 행사가 되었다. 더구나 후배 지도자들도 많이 참석해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식순에 따라 의식과 시상, 인사말로 이어지고 회식에 들어갔다. 오랜만의 만남이요, 정겨운 자리라 얼굴들이 상기된 모습이었다. 아쉽지만, 1시간 남짓한 시간을 즐기고 서둘러 돌아왔다.
새해를 맞았다. 코로나도 진정세를 보여선지 그동안 못 가졌던 행사들이 줄을 이었다. 그래도 조심을 해야지 하면서 관망하고 있는 가운데 1월 월례회의를 앞두고 또다시 L 원로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정월달이니 밥 한 끼라도 사고 가야할 것 같다”고 했다. 만감이 교차하면서 대답을 못하다가 “그렇게 하시지요”라고 목멘 소리로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1월 10일 오전, 자택으로 모시러 갔더니 “맨날 총무만 고생 시킨다”라고 역정을 내는 게 예전 같지 않고, 어떤 ‘결기’ 같은 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깊은 신앙생활을 통해 터득한 마음가짐과 준비에서 오는 행동으로 이해되었다. 나와는 같은 가톨릭 교우이기에 쉽게 통하는 메시지처럼 받아들여졌다.
식당에 들어서서도 연기하는 배우처럼 행동했다. “그동안 신병 때문에 못 나왔으며, 시력까지 떨어져 더 나빠지기 전에 뵙고 밥이라도 사고 싶어 나왔으니 오늘만큼은 회비를 받지 말라”고 내게 당부까지 했다. 눈시울이 뜨거워 대답조차 제대로 못 했다.
점심 식사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서 화담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나만은 지난달 송년회 일도 있고, 느낌이 달라서 밥이 들어가질 않았다. 괜히 불안한 생각이 들어 빨리 끝났으면 싶었다.
가까스로 한 시간이 흘렀을 무렵 L 원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가서 점심값을 치렀다. 적잖은 금액으로 이십삼만 오천 원이나 되었다. 예상했던 일이나 과연 나도 언젠가 이렇게 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 맴돌았다.
이렇게 정확하고 분명한 ‘작별 인사’를 병석에 누워서도 준비했으리라는 믿음이 나를 새삼 감동케 했다. 40여 년 전이다. 내가 송광 훈련장에서 기본 훈련 강사로 봉사하던 때, L 원로가 내게 다가와 경험담을 소개하며 남긴 깊은 인상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고기를 잡아주기보단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줘야’ 한다는 의미로 기억하고 있다.
2주일 뒤다. 손전화기에 L 원로에게서 전화가 왔었다는 문자가 남아 있었다. 급히 걸었으나 받지 않았고, 며칠 뒤에야 연결되었다. 응급실로 실려가 혼수상태에 있다가 잠시 회복되었기에 목소리를 듣고 싶어 걸었다는데, “나 인제 갈랑가 봐요”라고 목이 잠겨 실오라기 같은 목소리로 ‘작별 인사’를 건네 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러고는 1월이 끝나기 하루 전날 바람처럼 홀연히 이승을 떠나서 장례식장의 하얀 국화꽃 속에서 환히 웃는 사진으로만 뵐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