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타임(coffee time)은 해피타임(happy time)이다.
커피의 향은커녕 맛도 몰라 커피를 무슨 맛으로 마시느냐고 물었던 나에게 커피의 향을 알게 해 준 그는 마음씨 고운 작은 소녀였다.
“선생님, 차 한잔하실래요?”
아득히 먼 먼 세월의 언덕을 넘어 들려오는 목소리다.
한 세대를 획으로 긋는 시간만큼 멀고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그때는 그랬다. 마흔 고개를 눈앞에 둔 청년 때였다.
넓은 과학실 한쪽을 나지막한 자료 진열대로 막아 세 들어 근무하던 때였다. 그는 과학실을 관리하고 있었고 나는 정신지체아 반인 사랑 반을 지도하고 있었다.
출근하여 두어 시간이 지나면 그가 제의해 온다.
“선생님, 커피타임이에요.”
“어? 벌써 해피타임이네.”
그는 그 시간을 커피타임이라 불렀고 나는 해피타임이라 불렀다.
탁자는 양쪽을 나누어놓은 자료 진열대였다.
“커피는 건강에 안 좋다는데 오늘은 들깨 차가 어떨까요?”
“에이? 그래도 커피를 마셔야 차를 마시는 것 같죠. 뭐니 뭐니 해도 차 중에서는 커피가 제일이죠.”
“어마, 선생님 벌써 커피 중독됐나 봐요. 어쩌지요? 제가 중독을 시켜버려서.”
“아니지요. 제대로 가르쳐 준 거지요. 하마터면 커피 맛도 모른 채 세상을 살다 갈 뻔했잖아요.”
처음에는 녹차를 마셨다. 그러다가 그가 마시는 커피잔에서 솔솔 풍겨오는 커피 향이 더 싱그러워 나도 메뉴를 커피로 바꾸게 되었고 커피는 맛보다는 향이 더 그윽함을 알게 되었다.
“제 동창생을 사랑하게 되었는데요.”
“그래서?”
“영원히 사랑하고 싶었는데 그쪽 부모님이 고개를 흔드셔요.”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쪽 부모님을 설득시켜야지.”
“그래도 안 되면요?”
“그때는 탈출해야 하고”
“탈출이라뇨?”
“줄행랑치는 거지. 둘이서 손잡고 달아나는 거야.”
나는 하지도 못하면서 남에게는 쉽게 조언해 주는 그 시간은 그래서 해피타임이다.
“선생님께서 글을 쓰시려면 지독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써 보세요. 바람피우는 사람 얘기도 괜찮아요. 어쩌면 거기에 더 진실한 사랑 얘기가 있는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 사람을 용서해 주는 어떤 사람의 얘기도요.”
너그러운 마음의 소유자, 불륜까지도 용서해 주고 이해해 주어야 한다고 하는 사람. 그가 끓여주는 커피는 그래서 해피다.
“내일은 혼자서 커피 드세요. 저 내일 출장이에요”
“그냥 내일은 커피 마시지 않고 쉴게요. 출장 잘 다녀와요,”
“그러면 안 되죠. 염려 말아요. 제가 김 선생님 오라 할게요. 내일은 김 선생님하고 커피 마시세요. 그렇다고 너무 친해지시면 안 돼요.”
내일 혼자 커피 마실까 봐 커피 마셔 줄 삯꾼까지 물색해 놓은 여인. 나이는 나보다 한참 어려도 마음 씀씀이는 나보다 선배인 여인이다. 그런데 왜 남자 친구네 부모는 저런 여인을 싫다는 것일까. 참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사다.
“오늘은 창밖에 비가 내리고 있어요. 비가 내리는 날은 커피 향이 달라져요. 뭐랄까요? 있잖아요. 임을 떠나보낸 우울한 분위기 맛이 가미된 그런 커피 맛이요.”
“나 지금부터는 글 안 쓸 테니까 현이가 써요. 진짜 작가가 여기 있었네.”
글을 써 볼까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란다. 그런데 쓸거리는 태산인데 솜씨가 따라주지 않아서 포기를 했단다.
커피잔을 앞에 두고 앉으면 커피 향 속에서 그의 향이 함께 풍겨온다. 짧은 생애 속에서도 많은 일을 겪으며 살아왔음 직한 그는 모든 것을 수용하고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에게서 수없이 많은 커피를 얻어 마셨는데도 커피 한 잔 대접하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오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도 멀리 떠나고 말았다.
어느덧 30년이라는 세월이 말없이 흘러 가버린 지금,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좋아한다는 동창과의 사랑은 계속 이어졌는지,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해보고 싶다는 바람은 이루어졌는지…. 그에 대한 소식이 오리무중인 채로 한 움큼의 세월이 훌쩍 지나 가버려 이제는 마주쳐도 알아보지도 못할 나이가 되어버렸다.
문득 내 앞에 놓인 커피잔에서 솔솔 풍겨오는 향 속에서 그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여인이여! 커피의 향 속에서 그대의 넉넉한 마음을 보나니 나에게 커피타임은 해피타임인 것을 가르쳐주고 간 그 공로로 그대의 삶이 결코 고달프거나 외롭지 않으리라.
커피로 베푼 적선의 여운은 향보다도 수천수만 배 오래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