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시작되는 첫 달, 그달이 만월이 되는 날 한바탕 굿판이 벌어졌다. '푸진 굿'이라는 부제를 안고 펼쳐진 필봉농악의 대보름 굿이다.
푸진 굿은 나눠야 제맛이라더니 정말로 푸지게 사람들이 모였다. 더불어 시끌벅적 나누는 덕담도 넉넉하기 그지없어 진정으로 가슴에 담은 우리네 삶과 껍데기를 지탱해주는 마음이 더 푸진 날이다.
잘 살고, 못 살고, 잘 나고, 못 나고 개의치 않고 온 누리를 공평하게 밝히는 만월처럼 마음을 풍요롭게 다지고 그 빛 받아 태우는 달집은 우리에게 삶의 의욕을 부추기는 희망이 될 것 같아 나도 해마다 이 굿판을 따르며 푸진 삶을 소망한다.
굿판은‘기굿'을 시작으로 한해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당산제'를 지내고 마을의 식수원인 공동우물에서 마을 사람들의 건강을 비는 '샘굿'을 친다. 그리고 집마다 풍물패가 돌며 복을 비는 '마당 밟기'까지 굿패들도 지켜보는 사람도 한마음 한 몸으로 어깨를 들썩거리며 뒤를 따른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가족 단위로 찾은 관광객이 전통 민속놀이도 즐기고 귓병을 막아주며 1년간 좋은 소식만을 듣기를 바란다며 권커니 잣거니 귀밝이술 한잔이 오고 간다. 동네 사람들이 제공하는 필봉 국밥 또한 별미인데 이는 맛과 정을 나누고 흥이 가득한 잔치마당의 풍경을 더하기 때문이고, 화합과 단결의 미덕을 더 가미했기 때문 아닐까?
잠시 필봉농악에 설명을 덧붙인다. 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은 전북 임실군 강진면 필봉마을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호남 좌도농악의 대표적인 풍물굿이다. 1988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농악은 일 년 내내 다양한 형태와 목적으로 공연이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공연자들과 참여자들에게 정체성을 제공하며 국내외 다양한 공동체간의 대화를 촉진함으로써 무형문화유산의 가시성 제고에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2014년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된 자랑스러운 농악이다.
또한, 필봉농악은 징과 북의 수가 적고 잡색(雜色)이 두루 잘 갖춰진 것이 특징이며 개개인의 기교보다도 단체의 화합과 단결을 중시한다. 지금은 「필봉농악 보존회」가 공연·교육·문화 교류 등 다양한 형태로 전승하고 있다.
우리 것을 지키고 계승 발전시키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오늘날의 우리가 필봉농악을 즐길 수 있는 밑바탕이 된 것이니 필봉농악은 우리의 전통을 잘 담은 소중한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임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굿판에 끼어 신명 나게 놀 수 있는 흥을 지녔고 악기 하나쯤은 거뜬히 다룰 줄 안다. 필봉농악 보존회의 무단한 노력 덕분이다. 나도 어설프지만, 장구와 북을 다룰 줄 안다.
필봉에서 일 주 일에 한번 면 단위에 강사를 파견해서 필봉농악을 가르치고 있고 한 달에 한 번은 임실군 전체 수강생들이 모여 한바탕 푸진 굿으로 신명 나게 풍물을 즐기며 배운 덕이다. 그러니 이런 필봉농악의 산지에서 정월 대보름 굿을 친다니 어찌 한걸음에 달려가지 않을 수 있으랴!
낮 동안 이런저런 놀이로 대보름을 맞았다면 어둠이 마을을 감싸고 보름달이 그 어둠을 밀어내는 시간쯤, 꽹과리가 시작을 알리고 징이 이에 답을 하면서 정월 대보름 굿의 진수인 달집태우기가 굿 마당에서 넘치게 채워진다.
이를 놓칠세라 달맞이를 나온 사람들은 소원지를 달집에 붙이고 이어 불을 붙인다. 달집이 툭툭 큰소리로 타오르며 창공을 향해 길을 낸다. ‘탁탁’ 대나무 터지는 소리는 잡귀를 씻어내는 대동 한마당으로 어우러지고 묵은 액 훌훌 털며 타오르는 달집의 불줄기가 만월을 향해 쑥쑥 뻗어간다.
순간 내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 소원이 바쁘게 지나간다. 남편의 지병이 된 요통의 완치를 빌었고, 딸의 출산 후 건강과 손녀가 밝고 맑게 잘 자라기를, 두 아이의 부모가 된 아들 내외의 건강과 안녕을 욕심부려 빌고, 시어머니 무병장수를 빌었다.
그리고 숨 가쁘게 형제자매 건강과 우애를 소원하다 보니 어느새 달은 불길을 다 삼키고 포만감에 빠졌다. 그런데 어쩌랴! 정작 나를 위한 소원은 뒷전이었으니. 아무려면 어떠하리! 나보다는 우리를 위한 삶이 더 빛나길 소원하면 만사형통일 테고 필봉마을에서 맞이한 정월 대보름날 굿판 풍경 안에서는 그 누구의 소원도 다 이루어질 듯 푸지고 푸진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