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악산 눈길 산행
모악산 눈길 산행
  • 김규원
  • 승인 2023.01.26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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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풍/수필가
최규풍/수필가

아내가 손자 손녀 먹이려고 김밥을 싸는 것을 바라보다가 문득 눈 쌓인 모악산이 궁금했다. 오전 9시경에 배낭을 메고 버스 정류장을 뒤로하였다.

설산을 보면 심신을 목욕하고 싶다. 때 묻은 나를 온통 씻고 새 몸으로 돌아오고 싶다. 산에 들 때는 근심 걱정이나 무겁고 두꺼운 생각을 떨쳐버려야 한다.

눈길은 내 발길에 순백의 몸을 맡긴다. 등산화에 아이젠을 채우니 하얀 길에 상처가 난다. 와도 온 적 없고 가도 간 적이 없으면 좋으련만 기어이 흔적을 남긴다.

흔적 없이 오고 흔적 없이 가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욕망이나 권세나 아집에 찌들지 않은 순백의 삶이 그립다.

내 걸음은 터덕거린다. 나이를 탓하기는 아직 빠르다. 근력 운동을 멀리한 게으름을 탓해야 한다. 뒤에 나타난 청년이 나를 앞질러 씩씩하게 오른다. 나도 한때는 저랬다. 그 시절에는 장차 힘들고 느릴 줄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제는 멀쩡하게 산행하는 것으로도 무한한 행복이요 감사하다.

대원사까지 15분이면 거뜬하던 때는 한순간이었다. 반 시간이 걸렸다. 자연의 섭리를 따라 걸음이 느려지는 것을 어찌 한탄하랴. 바위 위에 내려앉은 백설처럼 털모자 속의 내 머리는 희끄무레한 눈이다.

눈을 맞이한 젊은 소나무는 눈을 털고 끄떡없는데 늙은 소나무는 쌓인 눈을 떨어낼 힘이 없다. 가지가 무겁고 힘들어서 부러지고, 쓰러진 주검을 백설이 덮어주고 추모한다.

계곡의 물은 급한 마음에 벌써 봄을 부르면서 재잘거린다. 바위들은 꿈쩍하지 않고 하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아직도 겨울잠이다.

헐떡대던 숨이 조용한 사찰 앞에 금세 얌전해졌다. 유서 깊은 고찰인 대원사다. 백설이 돌탑에 옷을 입혔다. 목이 말라서 약수를 마시려니 코로나19가 두려운지 바가지가 숨었다. 장갑을 벗고 손바닥으로 받으려다가 그만두고 입을 벌렸다.

석간수요 감로수다. 점점이 떨어지는 물이 링거주사처럼 더디었다. 가뭄이 길었던 이 겨울에 달콤한 약수가 콸콸 쏟아지겠는가. 법도가 높은 약수인지 끊어질 듯이 가늘게 이어진다.

이 귀하고 뜸한 약수를 마시고 진묵대사를 비롯하여 고승이 나온 것일까. 나도 한 모금 마셨으니 고승의 수행 심을 흉내 낼까? 숨쉬기에 불편하고 입김으로 눈썹이 젖어도 마스크를 사랑하자.

정상으로 오르는 절벽은 극한의 수행 길이다.  등줄기에 육수가 흐른다. 마스크가 산소호흡기를 부른다. 다리는 제발 쉬어가자고 조른다후들거리는 다리와 헐떡거리는 가슴을 달래고 부추겨서 드디어 정상의 옷자락을 잡았다.

이정표는 정상인데도 정상이 아니다. 조망대에서 정상을 바라보니 거대한 안테나가 하늘을 쑤시고 정수리를 밟았다. 점령을 왜 막지 못했을까? 다가가니 폭설이라 출입 금지를 붙이고 자물쇠를 채웠다.

모악산 정상은 시민의 품으로 돌아올 수가 있을까? 거의 불가능하고 희망 사항이다. 모악산은 철제 기둥을 머리에 박았으니 얼마나 아프고 무거울까? 정상을 비스듬히 피해서 세울 수는 없었을까?

오래 머물 수 없게 바람이 차갑다. 땀이 식으니 체온이 빠르게 떨어진다. 김밥과 온수로 허기를 달래고 중인리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해가 짧으니 서둘러야 한다. 오르는 길이 힘들었지만 내려가는 길도 만만치 않다.

높이 오르면 서둘러 몸을 낮추어야 한다. 높은 자리에 군림하여 오래 머물거나 지체하면 탈이다. 내려갈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길고 아늑한 중인리 길을 택했다. 북봉을 지나니 급경사면이다. 인적이 드무니 길은 조용하고 멀다. 옛날에 벼슬아치가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은 어땠을까? 하산하여 집으로 가는 길은 마음이 놓인다.

도계 마을이 닥쳤다. 도계라는 지명에서 문득 선계(仙界) 떠오른다. 양옥이 들어서고 돌담이 사라지고 있다. 화려한 양옥이 한옥을 내쫓는다. 한옥이 설 자리는 어디인가? 글로벌이나 세계화도 좋지만, 자꾸만 사라지는 한()문화의 전통이 안타깝다.

중인리 종점에 이르러 비로소 아이젠을 풀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격랑을 헤치고 모처럼 감행한 눈길 산행이었다. 시간이 무척 길고 몸이 무거워도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백설의 모악산을 뒤로하고 백발을 날리며 버스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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