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화되어가는 한국 사회의 비극“
‘원자화되어가는 한국 사회의 비극“
  • 김규원
  • 승인 2023.01.09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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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91회

새해를 맞이한 지 이제 겨우 열흘 남짓에 우울한 이야기를 하자니 켕기는 바가 없지 않다. 그러나 만사 생각하기 나름이다. 우리가 끝내 버리지 못하고 일상에서 활용하는 음력으로 보자면 아직도 분명 섣달[12]-묵은해다. 아직 새해가 되지 않았다. 양력 110일이 음력으로는 여전히 섣달 열 아흐렛날이다. 이런 시점에는 조금 우울할 수도 있지만 우리네 삶을 돌아보는 것이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려는 마음가짐으로 그리 나쁠 것도 없을 것이다.

들잠이라도 자러 가는 길일까, 아니면

자소서 쓰다가 지우다가 잠깐 눈 붙이려 가는 참일까

다리 난간 앞에 놓인

끈이 가지런히 묶인 운동화 한 켤레 -<필자의 시가지런한 신발1>

지난해 섣달 중앙일간지에 실린 기사가 필자를 못내 우울하게 하였다. 1면에 실린 커다란 사진에는 서울의 자살명소[?]로 알려진 다리 난간 앞에 운동화 한 켤레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사연을 묻지 않아도, 기사를 읽지 않아도, 상황을 짐작할 만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1년 자살사망자는 13352명이었다고 한다. 이런 수치에 평균을 내는 일도 송구한 일이지만, 하루 평균 36.5명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10~3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며, 자살률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 기사의 앞머리에 실린 사진은 이런 통계적 상황을 한 눈에 알아보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누구는 오이시디 랭킹을 점검하고

누구는 일찍이냐 이찍이냐 찍찍이를 붙이려 하지만

누구도 가지런히 정리했던

긴 고민 짧은 선택에 대하여

일상의 연민으로 순간의 절망으로 조문할 뿐 -<가지런한 신발2>

정치의 근간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은 너무 고급한 질문일까? 지난해 우리는 한때나마 선진국 진입을 환호한 적이 있었다. 10이 되었느니, 7에 어느 나라를 제치고 우리나라가 들어가야 한다느니, 설레발이 극성이었다. 그러면 뭐 하나, 그런 환호성이 1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선진국 이야기는 쑥 들어가고 썰렁한 기운이 온 나라를 휩쓸고 있으니 말이다.

그때 우리나라도 강소국, 복지선진국이 실현되는 줄 착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선진국을 가불한(조국가불 선진국) 격이 되고 말았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꼴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 수치나 평가보다 나를 절망케 한 것은 이 한 장의 사진이었다. 그가 다리 난간 앞에 운동화를 가지런히 벗어놓고 강물로 뛰어들기까지, 우리는 사회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셈이다. 그래서 오늘도 36.5명이 그런 극단적 선택을 하고 있으며, 이런 수치는 갈수록 더 높아질 것이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이처럼 홀로 가슴앓이하다 스러져가는 젊은 영혼을 달래줄 그 어떤 손길도 없어 막막하기만 하다. 한국사회의 현실을 냉철하게 내다보는 석학의 진단이 섬뜩하다. “대한민국은 가면 갈수록 서로 접점을 찾지 못하고 경쟁 속에서 스스로 생존만 도모하느라 여념이 없는 원자화된 개인들의 나라가 됐다.”(박노자) 농경사회에서는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하였으며-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왔다.” 그러나 산업구조와 사회체제가 엄청나게 바뀐 21세기, 자본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과학기술 만능사회에서는 국가 의제agenda가 바뀌어야 한다.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는 나라-국민의 생존권을 지켜주는 나라를 일등국가요 선진국이라며, 온 세계가 그런 나라를 지향하고 있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세상은

절벽이나 낭떠러지마다 이정표를 세우느라

만만한 버들치들 미꾸라지들이 날뛰는데 -<가지런한 신발3>

지역별 차등화로 편 가르기하며 재미를 본 정치 기득권자들, 주류를 자처하는 언론권력자들은 세대와 성별을 편 가르기의 대상으로 삼아 손해 보지 않은 정치성과를 거두었다고 판단하는 모양이다. 이제는 젊은이들까지 편 가르기의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 내편 아니면 아예 돌아볼 엄두를 내지 않는 풍토가 바로 원자화된 사회의 모습이다.

우리나라 신생아 출생률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다면서 각 지방자치단체마다 인구를 늘리느라 각종 아이디어를 내어 유혹하고 있다. 그런데 불확실한 출생률을 높이는 것, 오지 않으려는 도시민들을 불러들이느라 헛돈을 쓰는 것보다 더 확실한 대책이 있는데 그 대책을 안 쓰는 것이 이상하다. 지금 살아서 숨 쉬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정책을 펴고, 그들을 끌어들여 주거며, 토지며, 일자리를 만들어 준다면 확실히 인구를 늘릴 수 있을 터인데, 그것을 몰라서 안 하는지, 알고도 안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젊은이들을 살려야 한다는 대책은 원자화된 사회에서 도무지 꿈조차 꿀 수 없게 되었다. 여야, 동서, 남북, 남녀, 세대, 이들은 척결해야 할 적으로 보는 한 복지와 생존권은 각 개인의 일이 되고 말았다. 노자의 핵심 사상인 유무상생有無相生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앞에서 열거한 세력들은 한쪽이 없으면 다른 쪽도 살아남을 수 없다. 반드시 연대와 협력, 상부와 상조의 정신이 작동하지 않는 한 우리 사회는 영원히 원자들의 돌출로 인하여 끊임없는 불협화음으로 날을 지새우게 될 것이다.

올들어 추위의 가장이 찾아온 날, 어떻게

저 깊은 따뜻함에,

이 차가운 희망을 입수하려 했을까

몸서리치며 내쉬는 숨결에는

하얀 피로 물든 몇 방울 활자가 어른거리는데-<가지런한 신발4>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겨우 하얀 눈물 몇 방울이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동정심도 아니고, 분노의 표시도 아니며, 다만 그런 자를 붙잡을 수 있는 아무런 방법도 지니지 못한 내 무기력에 대한 연민의 한숨일 뿐이었다. 그럴지라도 내가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자책만은 면책될 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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