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 통석』(이홍우. 김영사. 2006)에는 대승불교의 핵심이 오묘하게 담겨 있다. ‘참 비어 있음’과 ‘채워져 있지 않음’이 다르지 않다거나,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이 같다고 한다. ‘여래如來’는 ‘참 그러함[眞如]’에서 온 분인데, 여래나 진여를 말[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 진여는 “일체의 구분이 배제된 ‘절대의 세계[平等]’”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소통하기 위해 말한다고 하면서 결국은 그 말이 또 다른 원인이 되어 불통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본다. 우리의 삶이 잠시 잠깐도 말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에서 보면 더욱 난감하다. 무심코 발설하는 구어는 말 그대로 비문이요 난문이며 어불성설인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말의 전선을 타고 오늘도 별 탈 없이 소통한다고, 소통되었다고 믿는 듯하다.
겨울햇살에 말린 빨랫감을 개키며
아내가 그런다
어머~ 새 옷 같아요!
나는 하마터면 내게도 날개가 있었던 날
아스라한 언덕을 오를 뻔했다 -<필자의 시「새해라는 말」1연>
겨울은 그야말로 동면의 계절이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만이 아니다. 알뿌리 식물이나, 뿌리채소들, 그리고 열매[씨앗]으로 겨울을 나는 식물이나, 이파리를 떨어뜨린 채 겨울을 나는 벗은 몸[裸木]이나, 상록수라며 치켜세우지만, 그도 겨울을 나기 위해 이파리는 얼어붙은 채 에너지 상실을 최소화해야 한다. 이렇게 동면하는 생명들에게 햇볕은 그야말로 생명의 원천이다. 그 햇볕이 ‘겨울빨래’마저 새 옷처럼 말렸다 한다.
‘새해’라는 말에 흥미를 잃었다. 가장 큰 요인은 나이 탓이겠지만, 말의 뿌리를 찾아 들어가다 보니 도무지 동의할 수 없는 말이다. 만물은 해를 거듭한 만큼 낡아갈 뿐이다. 새로워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유萬有는 발생 즉시 어김없이 생로병사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동식물은 물론 우주 만물이 모두 낡아갈 뿐이다. 그래서 그런다. 생명의 원동력을 제공하는 햇볕에 말린 옷가지가 새롭듯이, 나의 새로움은 청춘의 날개를 달고 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간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청춘의 도전이 새로웠던 날들로 날갯짓을 한다.
뛰어내려도 상처받지 않던 날들
장벽이 아니라
바람막이였던, 새의 날 등을 타고 날을 뻔했다-<「새해라는 말」2연>
아침이 되면 새날이 밝은 줄 알았던 시절, 월요일이 되면 새 주일이 열렸던 것으로 알았던 의욕의 시대, 1일이 되면 한 달이 거저 주어지는 것으로 착각했던 욕망의 시기, 새해가 되면 365일이 당연히 선물처럼 안기는 줄 알며 반겼던 오류의 시기를 지나고 보니 새로움의 ‘새’는 ‘새鳥’가 아니었다. 내가 날아오를 수 있는 날개가 아니었다.
‘새로운 날’들이라며 나를 부추겼던 언사들은 실은 허사였다. 말로써 말을 밝힐 수 없는 것은 “내 눈으로 내 눈을 볼 수 없는 것”[대승기신론] 이치와 같았다. 새로운 날들이라는 게 실은 생명을 밝히는 촛불의 심지가 짧아지는 과정이었다. 하루는 하루만큼의 심지가 줄어들어드는 기간이었다. 일주일은 내 심연에 예비 된 일곱 개의 초를 불살랐을 뿐이었다.
한 달은 내 서정의 언덕 위로 떠 오르던 단 한 번뿐이었던 만월의 행복을 지운 흔적이었다. 새해-새로운 한 해는 실은 열두 번을 주기로 나이테의 눈금을 불렸을 뿐이다. 내 눈으로 내 눈을 볼 수 없듯이, ‘말로써 말을 설명한다’는 것은 논리로도 실상으로도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 실은 서글픈 일이었다. 늙음이 아무리 소멸이 아니라 위대한 완성[결실]이라고 견강부회할지라도, 새롭다는 말에 현혹되지 않을 만큼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새롭다는 말, 그 옷 역시
내 사전에는 없었던 날들을 비집고
새해가 떠오른다, 역시
내 앨범에 자리를 튼 새는
날마다 입성이 낡아갔으며, 날마다
주름 깊어가는 밭이랑뿐
어디에도 청춘을 업고 날아오르는
푸른 날개는 없었다-<「새해라는 말」3연>
그럼에도 새해라며, 새날이라며, 새롭다며 설레발을 치는 세상을 향해 나는 조용히 내 안을 들여다본다. 고요히 내 심연으로 노를 저어간다.
오래된 앨범을 정리한다. 문예 잡지사에서 무명 시인의 특집을 내주겠다며 자료를 보내라 한다. 자전 약력, 창작의 산실, 나는 무엇을 쓰고 있는가, 그리고 자료사진 등으로 꾸려 보내라 한다.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영정이 보였다. 할아버지 할머니 영정도 있었다. 말쑥한 서양식 양복에 넥타이를 두르신 아버지 어머니 사진도, 그야말로 사진만 남았다.
그리고 내 얼굴들이다. 10대의 까까머리, 20대의 봉두난발, 삼십대의 3:7가르마, 40대의 취기 어린 모습, 50대의 허무맹랑했을 난감한 차림, 그리고 조금씩 밭이랑이 깊어가는 60대 70대의 ‘나’가 나에게 나라고 들이대는 형국이었다. 도무지 그 나에게서 나를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도대체 어디로 달아났단 말인가. 그토록 많은 ‘새해’를 맞으면서도 그 새로운 나는 모두 어디로 줄행랑을 쳤단 말인가.
앞문으로 들어와 앞문으로 나가는 게
주인이신 날들이라면,
앞문으로 들어와 뒷문으로 나가는 저
도둑걸음, 내 사전에도 없는
날개를 달고 걸어서 달아나는 저 톱니를
어찌 새롭다, 새 날개라며
동무할 수 있겠는가
잡아둘 수 있겠는가 -<「새해라는 말」4연>
주인은 제집에 당당하게 앞문으로 들어온다. 나갈 때에도 당당하게 앞문으로 나간다. 그러나 도둑고양이 세월[시간]은 앞문으로 들어와 뒷문으로 달아난다. 저 달아나는 도둑 걸음을 어떻게 잡아둘 수 있겠는가, 쫓아낼 수 있겠는가. 시간은 서두르지 않는다. 마치 장갑차의 캐터필러처럼, 톱니바퀴처럼 레일 위를 야금야금 걸어서 달아날 뿐이다.
그래서 그런다. 천지 운행은 새로움도 낡음도 없다. 오직 굳건하고 튼튼하게 운행[天行健-莊子]할 뿐이다.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이 다르지 않다면, 새해 역시 새로움이자 낡음일 뿐이다. 군자[지성인]은 그래서 자강불식自彊不息[스스로 몸과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헛되이 쉬지 않음-장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