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 ‘도둑년’, ‘귀신은 뭐 하는가 몰러 데려가지도 않아’ 내 시어머니가 최근까지만 해도 주로 쓰시던 레퍼토리(repertory)다. 그런데 최근에 한 가지가 더 늘었다.
치매를 앓고 계시는 어머니는 옛날 일은 식탁에서 하는 얘기, 아침에 하는 얘기, 저녁에 하는 얘기, 틈만 나면 하는 얘기가 녹음기를 튼 듯 반복하시면서 정작 최근에 일어나는 일은 무조건 모르쇠로 일관하며 주로 쓰는 말이다.
당신이 꼭꼭 숨겨두고도 찾지 못하는 물건이 있으면 먼저 나를 의심하고 가끔은 도둑년이라고 하신다. 그러다가 내가 그 물건을 찾아드려도 결국은 내가 숨긴 거라며 또 의심하신다. 그럴 때 하도 답답해서 “어머니는 왜 또 억지 소리하세요?” 말대꾸라도 하면 “이 꼴 저 꼴 안 보려면 언능 죽어야 하는데 왜 죽지도 안 혀”하며 내 속을 뒤집는다. 이제는 어머니의 레퍼토리가 뻔해서 그냥 듣는 둥 마는 둥 하면 무시한다고 또 뭐라고 하신다.
그런데 며칠 전에 어머니는 다소 황당한 일을 저질러서 남편과 내가 수습하느라 곤욕을 치렀다. 세탁기에서 세탁이 완료되었다는 알림이 울리길래 세탁기 문을 여니 젤리처럼 뭉글뭉글한 것이 세탁기 벽면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아닌가. 대체 이 정체가 무엇일까?
아무리 살펴봐도 도통 알 수가 없어 빨래에 엉겨 붙은 정체 모를 물질을 털어내며 빨래를 꺼내다 보니 물을 먹다 먹다 배불러 반쯤 옆구리 터진 어머니 기저귀가 떡하니 들어있는 게 아닌가. 작년부터 대소변 처리가 미숙한 어머니를 위해 패드형 기저귀를 사드리고 사용한 것은 비닐에 싸서 쓰레기통에 넣으시라고 숙제를 드렸는데 아뿔싸!
패드를 속옷에 붙인 채로 빨래 바구니에 넣는 실수를 한 게 아닌가. 거기에다가 나는 그대로 세탁기에 넣고 돌리고 만 것이다. 나는 그 실수의 대가로 빨래를 꺼내고 세탁기를 몇 번이나 청소한 뒤에야 다시 빨래를 헹궈야 했고 종일 빨래 때문에 벌어진 소동을 수습하는데 진을 다 뺐다.
그리고 어머니께 속옷 갈아입을 때는 패드는 빼서 휴지통에 넣는 걸 잊으면 절대 안 된다고 말씀드렸더니 대뜸 “ 별꼴이 다 쌨네! 나는 비닐봉지에 넣어서 휴지통에 잘 넣었는데 왜 그게 세탁기에 있댜?” 하셨다. “그럼 기저귀가 제 발로 세탁기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을까요?” 했더니 “니는 날 아주 미친년 취급하는구나! 이이고~언능 죽어야 이 꼴 저 꼴 안 볼 텐디, 별꼴이 다 쌨네! , 별꼴이 다 쌨네” 돌림노래처럼 하시며 앉아계셨다.
또 어느 날은 노치원(주간 보호센터) 가시기 전 또 ‘별꼴이 다 셌네!’, 별꼴이 다 셌네!’ 하시며 거실과 방 서랍이며 장롱 속까지 뒤지며 들락날락하셨다. 무엇을 찾으시냐고 여쭤봐도 대답은커녕 또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라이터 숨겼냐?” 하신다. 내가 아니라고 한들 안 믿으시니, 나도 어머니 레퍼토리를 빌려와서
“몰라요.” 했더니 “너는 툭하면 모른다고 하더라. 숨겼으면 언능 내놔라” 그러셨다. 사실 숨기고 싶은 마음이야 몇 번 있었다. 어머니가 가끔 치매 증상이 돌면 집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바람에 담배 냄새를 빼느라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종종 있고 이불 위에 담배 재를 털어놓은 적이 있었던지라 한밤중에 우리가 잠들었을 때 그런 일이 또 생긴다면 화재의 위험도 있어 늘 걱정이 되긴 했지만, 마음뿐이지 결코 숨긴 적은 없다.
결국은 어머니가 들고 다니시는 가방에서 휴지로 돌돌 말아놓은 라이터를 찾아드렸지만, 어머니는 또‘별꼴이 다 쌨네!’, ‘별꼴이 다 쌨네!’ 하면서 노치원에서 모시러 온 차를 타고 등원하셨다. 어머니 위치에서 보면 날마다 별꼴은 이렇듯 많이 생긴다. 내가 한 기억도 없는데 황당한 일이 벌어지니 말이다. 살아온 기억을 잃어가는 것만큼 비참한 것이 또 있을까? 누군가를 사랑했던 기억으로 사랑받으면서 살고, 누군가에게 힘이 되었던 만큼 누군가에게 의존하면서 80여 년이나 차곡차곡 쌓아온 기억이거늘.
나 또한 하시지 마시라고 그만하시라고 제지하는 것이 많다 보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고 미치고 팔짝 뛰고 환장할 일 많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럽고 또 한편으로는 원망스러운 마음 사이에서 날마다 갈등한다.
이 두 마음의 간격을 좁혀가는 게 최대 관건인데 모든 병이 그러하듯이 가장 좋은 치료 약은 따듯한 사랑이란 걸 이론적으로 빠삭하지만, 실제로 내 삶에 끼워 넣기는 쉽지 않다. 2년 전 이맘때쯤 <백강임 여사와 함께 사는 법>이라는 수필을 쓰면서 모시고 사는 게 아니라 함께 사는 것이라며 다독이던 마음을 다시 소환해 내 앞에 내려놓는 이 순간에도 어머니의 레퍼토리는 시작됐다.
“별꼴이 다 쌨네!”,“별꼴이 다 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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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쌨다' 는 임실 사투리로 '많다' 또는 '흔하다' 라는 의미로 쓰인다.
#금요수필을 송년 기사 관계로 오늘(목요일)로 앞당겨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