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햇볕이 쨍하더니 다시 분무기로 물을 뿌리듯 슬쩍슬쩍 비가 내린다. 그냥 비를 맞이하기에는 뭔가 부족한듯하여 휴게소에서 자판기 커피를 한잔 빼서 차에 올랐다.
한 모금 한 모금 차를 마시는 동안 그 간격을 두고 차창의 윈도우브러쉬가 한 차례씩 내 생각을 지우듯 빗물을 지워나갔다. 바람도 은근슬쩍 작은 빗방울들을 우수수 창에 모았다가 자기 맘대로 지워버리며 내 기분을 살핀다.
기억의 페이지를 넘기면 한 장 한 장 지워질 것 같은 내 생각의 조각들이 흑백 사진첩만큼 한 토막씩 잠깐 내놓았다 집어넣기를 반복한다.
비 때문인지, 다시 나의 엉뚱한 잠적의 유혹에 빠져 기어이 대나무 사이로 바람에 서걱거리는 샛길로 빠졌다. 초가을의 숲은 사뭇 경건하다. 성장을 마무리 짓고 열매를 기다리는 시간이 마치 순산을 기다리는 산모의 마음을 닮았다.
박새가 왜 덤불에 둥지를 트는지, 도토리가 숲에서 얼마나 많은 동물을 먹여 살리는지, 고요 속의 치열함이 얼마나 공존하는지 물음표만 안고 산길을 지나가다 잠시 바람처럼 눈길을 숲으로 둔다.
숲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자리를 지키는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생동하는 수많은 생명이 꿈틀거리는 곳이다. 단지 숲의 생존 사이클이 인간보다 더 길어서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이다.
나는 그냥 눈길만 접고 나왔는데 바람은 숲 냄새를 한주먹 쥐고 빠져나와 줄행랑치다가 하얀 나비 같은 건을 쓴 수녀님의 옷자락에 묻히며 내가 찾아오노라고 기별을 넣는다. 숲을 나오자 보슬비를 맞으며 아이처럼 환한 미소로 수녀 친구가 반긴다.
수녀님과는 여고 시절에 맺은 인연이다. 학창 시절에는 비록 말 한마디 주고받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동창생이었지만, 사회에 발을 딛으니 학연으로 맺어진 인연이 참 잘 짜인 매듭 같다.
어느 날 수녀님과 양로원 어르신들 목욕 봉사를 하고 돌아오던 날, 수녀님의 승용차가 빗물이 질펀하게 고여 있는 비포장 길을 달리다 한쪽 바퀴가 빠져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휴대전화가 흔한 시절이 아니었던지라 어디 연락할 방법도 없고 인적마저 드문 오지에서 두어 시간을 아무 대책 없이 지나가는 차량만 기다리다가 결국은 차를 포기하고 걸어야만 했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산새 소리만 정적을 깨는 시간 그녀는 성직자 특유의 침착한 목소리로 "친구야 괜찮을 거야.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잖아."라며 나를 안심시켰고,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는 산길을 무작정 걸어 새벽이 되어서야 생쥐 꼴이 되어 겨우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플래시 불빛 하나에만 의지한 채 언덕을 오르고 내리며 자빠지고 미끄러지며 두어 시간을 그렇게 길을 헤매며 도착해서인지 성당에 와서는 아주 편안한 친구가 돼 있었다. 그 후부터 나는 가끔 마음이 허해진다 싶으면 습관처럼 그녀를 찾아가곤 한다.
처음에는 그녀를 보면 자꾸 슬퍼졌는데, 흰색, 혹은 잿빛 옷을 걸친 절제된 엄숙함보다는 칼날 같은 슬픔을 연상하는 것은 내 안에 잠재된 그녀의 과거 때문이었을까?
세상에 분풀이하듯 무작정 세상을 등지고 수도회에 들어가던 그때처럼 그녀의 마음도 어쩌면 나비처럼 가벼울지도 모를 일이라 여기니, 어느새 내 곁을 떠났다고 여겼던 친구가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나를 보듬고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도 가을 탓일까? 또다시 나비 같은 건을 쓴 한 친구를 찾아 세상사 푸념을 늘어놓고야 말았다. 일이 잘 안 풀리거나 부부싸움을 한다든가 아니면 우울한 감정에 휘말리거나 하면 습관처럼 이 길을 달려 친구가 타주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그녀의 눈만 바라보다 돌아서도 살얼음 녹듯 마음의 응어리가 사르르 녹아내리곤 했는데, 오늘은 아무 연유 없이 그녀가 보고 싶었다.
유난히 무덥던 여름 그 정열 같은 날들을 지나 또 한 번의 가을 그 초입의 빗방울이 나를 습관처럼 친구를 찾으라고 부추긴 탓이려니 여기며, 나를 닮은 두툼한 머그잔에 가득 탄 차를 다 마시고 몇 번 눈빛을 주고받고 돌아서는 말머리에 늘 그랬듯 그녀는 나를 부른다.
“친구야! 그래도 넌 나보다는 배로 행복한 거 알지?”
여전히 가을비는 보슬보슬 내리고 숲은 조용히 공생하는 생명을 보듬어내고 나비처럼 나풀거리는 친구의 잔잔한 미소는 차향 같은 진한 우정으로 벅차게 내 가슴속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