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비는 어디 아파서 오셨으라? 나는 사방간디 삭신이 쑤셔서 죽지 못해 살아”
“안 아픈 데 있가니. 당뇨에 혈압에 고지혈증에 움직이는 종합병원이여”
“작년에 아들이 이백만 원이나 들려 임플란트를 해줬는디 안 맞아서 그런가? 잇몸이 아파서 당최 뭘 먹을 수 없당게”
“놀고먹으며 돈만 축내니 자식들헌테 면목이 안 선당게요. 언릉 죽어야 하는디 죽지도 안 혀”
삶의 끄트머리쯤에서 자식에게 다 내어주고 쭉정이만 남은 늙고 병든 몸을 서로의 하소연으로 위안 삼으며 약을 기다리는 어르신들의 대화를 엿듣는다. 대부분이 두세 달씩 드실 장기 처방 약을 지어가니 대기시간도 그만큼 길어지고 무료한 어르신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는다.
여기저기 안 아픈 데 없다는 어르신, 밥맛이 없다는 어르신, 혈압 당뇨 같은 지병이 있으신 어르신 등 하루에 수십 분씩 상대하다 보면 귀에 인이 박힐 정도로 듣는 말이 “죽어야 하는디 죽지도 않아”라는 말이다.
“자식들 걱정한다고 아픈 것도 말 안 하고 병원도 안 다니시고 약도 잘 안 챙겨 드시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오히려 자식 걱정만 시키는 일이에요. 막말로 떨어져서 어르신들 원대로 죽기나 하면 괜찮지만, 어디 한군데 불구 되어 누워 있기나 해보세요. 그러니 당최 죽는다는 말씀은 마시고 아프면 아프다고,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그때그때 표현하면서 즐겁게 사셔야 해요”
나는 약을 드리며 건강하게 잘 사는 게 자식 도와주는 일이니 약 잘 챙겨 드시고 식사도 잘하셔야 한다며 자식처럼 당부를 보태곤 한다.
요즘 어르신의 레퍼토리가 대부분이 죽는다는 소리다. 내 시어머니도 입에 달고 사신다.
“어머니! 친구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조문 다녀올게요”
“그래라 근디 나이가 많냐?”
“예, 어머니 올해 여든네 살이래요”
“아이고! 적당한 나이에 잘 갔구마. 나도 얼른 가야 하는디, ”하신다.
“어머니 삼일만 식사 안 하고 약 안 드시며 되요” 하고 농을 했더니
“야 좀 봐라, 3일이나 어떻게 굶냐?”하신다.
“그러니까 죽는다는 말씀 함부로 마시는 거 아니에요”라면 겸연쩍게 웃으신다.
“귀신은 뭐 하나 물라. 데려가지도 않고” 조금만 서운하게 하면 협박처럼 말씀하신다. 그러면서도 약은 꼬박꼬박 챙겨 드신다. 내가 깜빡하고 못 챙겨 드리는 날에도 빼 먹는 일이 없다. 초기치매를 앓고 계시지만 약 드시는 것은 안 잊으신다.
함께 살다 보니 이제는 어머니의 거짓말이 다 보인다.
“빨리 죽어야지”이말은 오래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겉으로 에둘러 흘러내는 말이다. 날마다 죽는다면서 절대 죽을 짓은 안하신다.
“바쁜데 뭐 하러 와, 안 와도 된다.”말은 그러면서 아들딸은 잘 있는지 날마다 여기저기 전화하신다.
“너희들끼리 즐겁게 놀다 와라” 나들이나 외식을 할라치면 늘 한바탕 가니 안 가니 실랑이를 한 뒤 결국은 앞장서신다.
“괜찮아”하면서도 “너도 늙어봐라” 하신다.
“이 나이에 무슨 돈이 필요하냐?”하면서도 “누구네 아들은 뭘 사줬다더라”, “용돈을 얼마 줬다더라” 비교하신다.
그래서 이제는 이런 말씀은 대부분 반어법적 수사로 정반대로 새겨들으니 서운함도 덜하고 실수도 적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세월과 함께 늙어 간다. 누구도 이 자연의 섭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진정 멋지게 늙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멋지고 곱게 늙어 갈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감사와 축복은 없을 텐데.
흔히 노인을 ‘어르신’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그 말속에는 인격이 쌓여 남에게 모범이 되고 오랜 연륜과 사회 경험을 통한 분별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을 만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노인 세대가 “늙으면 죽어야 해”라는 말보다는 “노년은 즐거워”라는 문화가 형성되어 따르는 다음 세대에 어르신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 또한, 어르신들이 풀어야 하는 숙제가 아닐까? 싶다.
백 세 인생이라는 노랫말처럼, 팔십 세에 저세상에서 데리러 와도 아직은 쓸만해서 못 간다고 말하고, 구십 세에 저세상에서 데리러 온다 해도 알아서 갈 테니 재촉하지 말라고 하고, 백 세에 저세상에서 데리러 온다 해도 좋은 날 좋은 시에 간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어르신들의 인생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