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을 펼쳐 놓은 것 같은 봄 길을 걸었다. 연일 터지는 꽃 소식에 멀리 떠나기엔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버티는 짓도 참기 힘든 그런 날이 있다. 그럴 때는 창문을 열고 햇볕이 좋으면 커피 한잔 내려 보온병에 넣어 들고 길을 나선다.
나들이하고 싶어 시무룩한 내 삶을 데리고 말이다. 시내버스로 갈 수 있는 곳을 생각해 본다. 금산사, 아중호수, 모악산, 비비정, 그 외에도 여러 곳이 있지만, 오늘은 호숫가를 걷고 싶어 가까운 곳에 있는 아중 호수를 찾아갔다.
자연은 제 속도에 조바심하지 않고 늘 하던 그대로 질서를 지키고 있었다. 모양이 곧거나 예쁘지 않아도 자연이 만든 그대로 건강하게 둔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자연이 정겹고 고맙다.
자연이 숨을 내 뿜는 향기로운 공간으로 발길을 옮겼다. 데코로 잘 만들어진 둘레 길을 걸었다. 3월의 따사해진 햇볕, 살가워진 바람결, 새들이 노래하는 곳에서 향긋한 봄의 체취를 조용히 느껴본다. 청정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와 닿는다. 턱밑까지 올라온 평온을 온전히 누릴 수 있어 행복하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이곳을 지키며 피고 지기를 수천만 번 거듭했을 자연을 마주하며 잠시나마 세상 시름을 털어 낸다. 따뜻한 한마디 위로의 말처럼 봄은 그렇게 시린 가슴을 포근하게 감싸 안는다. 호수가 봄바람에 일렁인다. 호수에 스민 속엣것들이 일렁인다. 사랑이 일렁인다. 이별이 일렁인다. 아니, 욕망과 싸우다 삶을 포기한 죽음이 일렁인다.
소란했던 세상사에서 치열한 싸움도, 들끓던 우리의 번뇌 망상도 이곳 호수에 와서는 다소곳해졌으리라. 그러나 모두 어디에 숨었는지 종교처럼 고요하다. 지금 나와 함께 흐르는 이 시간은 있는 그대로 평화다. 언덕에는 세찬 눈보라를 이겨내고 자란 봄나물들이 들려오는 인기척이 반가운지 환하게 웃고 있다.
푸르고 파란 새 생명의 여리고 반가운 인사가 여기저기서 뾰족하고 다붓하게 솟아 손짓한다. 여린 나뭇가지에는 태양을 입은 연두가 마주나와 붙어있다. 봄은 연두로 말을 걸어온다. 자연과 사람 이야기가 있는 가까운 도심 속 아중 호수는 주말이면 가족들과 함께 나들이하기에도 손색이 없겠다.
만만한 등성이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며 아직은 알싸한 바람에 부잡한 마음을 씻고 더는 짙푸른 욕망에 쫓기지 않는다. 호수처럼 고요에 잠기고 싶어서, 호수의 마음을 닮아보려 애면글면하지 않고 텅 빈 마음조차 풀어 젖히고 발이 움직이는 대로 걸어간다.
길은 언제나 한 곳으로만 나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갈래 뻗은 길 위에서 나는 언제나 조금 더 편한 길, 들꽃들이 피어있는 길을 택한다. 아기가 예쁜 시기에 빨리 커 버려 아쉽듯 계절 또한 눈 깜짝하는 사이 옷을 갈아입을 것이다. 환장하도록 아름답게 펼쳐지는 오월의 신록을 생각하니 초록을 좋아하는 내 마음이 어느새 들떠 저 먼 곳을 바라본다.
이제 아직은 잿빛이 많은 산에 연둣빛이 안개처럼 번지기 시작할 터이고 장끼들이 목청껏 암컷을 부르는 소리가 산촌의 오후를 무료에서 건져낼 것이다. 그때쯤이면 산벚꽃이 듬성듬성 피어 파스텔 톤의 산색을 한층 더 조화롭게 물들일 것이다.
고사리와 고비, 취나물이 돋아 봄 입맛을 풍성하게 하고 두릅이 뾰족하게 줄기 끝을 장식할 즈음이면 봄은 어느새 저만치 가고 풍성한 초록이 세상을 가득히 메워 내 마음도 풍성해지리라. 봄은 그렇게 오자 다시 가버리는 환상 같은 계절이어서 지루하지 않고 늘 그리움처럼 아련하다.
무릎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걸음이 느려졌다. 느릿느릿 걷다가 의자가 보이면 얼른 앉아 무릎을 쉬어준다. 기도하든지 작은 시집을 꺼내어 읽기도 한다. 살면서 쉬는 데 익숙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쉬어가는 삶이 찾아왔다. 무릎이 아프기 시작한 건 아마도 싸대고 다니지 말고 차분하게 정리할 때가 되었다는 의미이지 싶다.
쉬다 보면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꼬여있던 생각들이 한 올 한 올 풀리기도 한다. 아중 호수의 멋진 하루의 여정은 단출한 나들이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려놓기 위해서 더 열심히 살 참이다. 호수처럼 고요에 잠긴 숲길을 따라 걸으며 이 무릎으로 걸어갈 남은 거리가 얼마쯤인지 가늠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