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으로 가자. 울긋불긋 단풍 속으로든 하늘하늘 억새 곁으로든. 지천명을 지나고부터 화려함 안에서 들뜨기 보다 단백함 곁에서 소박하게 지켜보는 것이 좋아졌다. 그래서 단풍을 지나 억새곁으로 가기로 했다.
장수 장안산으로 향했다. 장안산은 장수군 계남면과 번암면 경계에 있는 산림청 100대 명산이란다. 백두에서 금강, 설악, 태백까지 남으로 곧바로 내달리다 서쪽으로 향하여 속리산, 영취산,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중 영취산에서 분기한 금남호남정맥의 최고봉(1,237m)이란다.
헐렁헐렁 걷는 나에게 다소 높지않나 걱정하며 길을 검색하였다.
다행히 무룡고개쪽에서 오르는 길은 해발 880m에 주차장이 있어 긴장하지 않아도 될성 싶었다.
인근 마을에 들어서니 도깨비 캐릭터와 함께 ‘장안산 도깨비 권역’이라 쓰인 아치가 도로위에 설치되어 있다. 도깨비는 골골 산산, 물 좋고 산 깊은 곳, 소담한 초가집과 외할머니를 생각나게 했다. 아련함을 불러일으키는데 그치지 않고 머물러 즐길 수 있는 지역이 될 수 있도록 도깨비 방망이의 신통술이 발휘되면 좋겠다.
울긋불긋 단풍들의 환영을 받으며 무룡고개 주차장에 도착했다. 아침 9시전인데도 주차장은 벌써 차들로 빈틈이 없다. 도로 옆 들머리는 장안산 허리 격한 경사면에 데크로 만들어져 부자연스러웠지만 편리했다. 이래서 利己와 便利앞에 자연은 항상 뒤로 밀려날 수 밖에 없나 보다.
들머리부터 능선따라 참나무과 나무들이 수북이 쌓인 낙엽들 속에서 말라버린 누런 잎들을 붙들고 서있었다. 땅에 떨어진 매마른 잎과 가지에 간신히 매달린 말라버린 잎을 보며 나의 지난 여름 푸르름을 생각한다. 햇볕 짱짱한 날, 빗줄기 시원한 날 온 몸으로 푸르름을 뽐내며 영원할 것 같은 날들을 즐겼었다. 이제는 이 푸르름을 그대로 감싸 안으며 성숙한 어른으로 익어가기를 다짐해 본다.
초입을 벗어나니 길섶에 조릿대가 즐비하게 무리지어 있다. 키 높이까지 자란 진초록 조릿대가 먼 풍경을 가로 막는다. 1.5㎞ 정도 되는 이 길은 밖이 아닌 내 안의 풍경을 보며 걸으면 좋을 듯 싶다. 내 안의 황량하고 거친 풍경을 다독이며 걷는 지금 내 마음에 따스한 평화가 깃든다.
30분 정도 걸었을까 샘터 표지판과 벤치가 나와 쉬어가기로 했다. 퇴직한 선배님이 보내준 대추를 먹으며 그 분의 선한 얼굴을 생각한다. 지시보단 먼저 행하고 야단은 내리지 않으셨던 분, 지금은 당구에 열심이라는 선배님이 항상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잠깐 입을 축이고 다시 능선을 걷는데 잎 떨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푸른 하늘이 다가온다. 온전한 하늘을 볼 수 없는 답답함에 발걸음을 재촉할까 마음을 다잡자 마자 고개넘어 바로 은빛 억새밭이다. 동쪽 능선, 가녀린 몸에 흰 머리 풀어헤지고 함께 모여 바람에 몸 맡기니 그야말로 장관이다.
함께하는 그 물결이 사람을 당기는 매력이리라. 전망대에서 막힘없이 펼쳐진 세상을 시원하게 바라본다. 이 산 넘어 저 산, 저 산 넘어 산, 산 그리고 하늘. 이 산은 억새로 은빛 물결이고 저 산은 단풍으로 울긋불긋이고 그 넘어 산과 산은 갈색이거나 검정이었다가 하늘과 만나 하늘색으로 물들었다.
다름과 다름이 만나려면 서로에게 물들어져야 하나보다. 이것이 大同世上이리라. 오른쪽 능선을 올려다 보니 윗산 한모퉁이 또 억새밭이다. 한 뼘 억새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귀여움을 지나 장안산 정상에 올랐다.
지인에게 선물받은 등산용 의자에 앉아 걸어온 길을 굽어본다. 지나며 마주한 억새들이 나를 보며 일제히 손 흔들어 환호하는 것 같다. 어디나 정상은 아래로 굽어보거나 수평으로 응시하는 시원한 맛이 있는 것 같다.
저~ 멀리 있는 산과 하늘은 단색으로 다가오고 가까운 풍경들은 다색으로 몰려와 한참을 멍때리고 앉아 있었다. 한참의 멍한 정지위로 노크하듯 떨어진 빗방울에 정신을 차리고 하산하였다. 뒷짐지며 편안하게 올라 북으로 덕유산을 비롯해 백두대간 산줄기와 멀리 지리산의 웅장함을 보고싶다면 이름처럼 길고(長) 편안한(安) 산, 장안산에 가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