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이 영하를 넘나드는 본격 겨울이다. 기온이 내려가면서 마음도 스산해지는 즈음에는 따뜻한 차 한잔, 뜨끈한 아랫목이 그리워진다. 언제부턴가 사라져버린 그 아랫목의 따끈한 행복을 생각한다.
기온이 내려가 가뜩이나 심란한데 정치판은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추태를 보여주며 심사를 긁는다. 선거 정국이니 이런저런 일이 귀에 들리고 눈에 뜨이기 마련이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고 진정 ‘국민을 물로 보는’ 장난질에 분노마저 치솟는다.
감탄고토(甘呑苦吐)라는 옛 경구(警句)가 있다. 우리 속담에도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라고 직역한 말이 있다. 이 경구의 뜻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자기 비위에 맞으면 좋아하고 맞지 않으면 싫어한다.’라는 의미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그러나 실제 사용은 필요한 사람은 비위를 맞추어가며 끌어들이고 쓸모가 없는 사람은 배척한다는 의미로 주로 쓰이는 말이다. 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를 잡고 나서 이제는 토끼를 잡을 일이 없으니 토끼 잡은 개를 삶아 먹는다.’라는 경구와도 상통하는 고사성어다.
지난주 내내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와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 사이의 줄다리기 같은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여론조사에서 10% 이상 우세한 결과가 나오던 시기에 만난 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 먼 데를 바라보는 것으로 끝났다. 윤 후보는 잘나가고 있는데 상왕 같은 김 위원장이 곁에 있는 상황이 불편했던지 김 위원장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 영입을 포기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이준석 국민의힘 당 대표와도 거리가 벌어져 이 대표가 당무를 중지하고 밖으로 나도는 상황이 되었다. 당대표의 의견을 묻지 않는 ‘패싱’이 계속되자 이 대표가 잠적했다. 잠적이라고 하지만 그의 행선지가 언론에 보도되고 기자들이 주변에서 근황을 보도했다. 잠적은 겉보기이고 윤 후보에게 ‘나를 받아들여 달라.’라는 밀당 제스처인 셈이었다.
마치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처럼 목에 깁스하고 버티던 윤 후보의 인기는 굳건한 신뢰나 기대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었다. 현 정부의 부동산 실정과 다수 민주당의 배부른 태도에 배신을 느낀 민심이 잠시 머물렀던 일시적 현상에 불과했다. 그동안 말실수라고 할 수 없는 무지함과 그릇된 시각, 주변 인물 배치 등을 보고 실망한 민심이 지난주 초부터 슬슬 조사 결과에 표출되었다.
그리고 주말에 가까워지면서 조사 지수가 역전되어 우세에서 열세로 돌아섰다. 여론조사에 응답하는 이들만의 지지 성향에 불과한 허상 수치를 믿었던 캠프에 비상이 걸렸다. 허상에 취해 건들거릴 때가 아님을 안 캠프 중진들이 출동하여 김종인 전 위원장에 머리를 조아렸다. 아마도 싹싹 빌어 토라진 마음을 간신히 돌려놓았을 듯하다.
마치 킹 메이커라도 되는 듯, 내 손에 대통령 만드는 조화가 숨어 있는 듯 무게 잡던 김 전 위원장이 다시 선대위 총괄 사령탑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이다. 그러면서 ‘이미 준비되어 있다.’라는 메시지를 내놨다. 이게 무슨 장난인가? 젊은 연인들 밀당도 아니고 만났다가 토라져 헤어지고 다시 만나 킬킬거리는 이런 정치쇼는 일찍이 없었다.
이준석과 윤석열의 화해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잠적했다는 인물이 연일 기자를 끌고 다니며 시선을 모으고 JTBC는 거창하게 인터뷰까지 해서 긴 시간을 할애하여 이 대표의 심경을 전달했다. 그런데 다음날 윤 후보와 이 대표는 빨간 후드티에 애들 장난처럼 글씨를 써넣어 입고 깔깔거리며 놀았다.
이런 짓도 선거 작전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실제 그랬다면 이건 심각한 일이다. 국민의 시선을 끌기 위해 서로 토라진 척 연극을 하고 극적인 화해를 했다면 국민과 언론, 정치판을 농락한 희대의 사기극이다.
지난 1주일 동안 국민의힘 윤 후보 관련 기사를 모아 보면 수백, 수천 건에 달할 것이다. 그많은 기사를 쓰느라 숱한 기자들이 손가락이 아팠을 터이다. 그런 모든 일이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었다면 대단한 기획자의 솜씨이고 타고난 사기꾼의 능력이라고 할 만하다.
한편, 이런 일들이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거나, 앞에 쓴 내용처럼 실제 윤 후보가 여론조사에 도취하여 상왕의 권력을 휘두르는 꼴이 싫어서 김 전 위원장을 배척했고, 이준석 당 대표를 패싱하려 했다면 바로 감탄고토라는 바람직하지 않은 정치 생리를 표출했다고 보아야 한다. 언제든지 끌어안을 수 있고, 다시 말하면 언제든지 팽(烹)할 수 있는 정치판이라고 하지만, 이런 신의 없는 정치 풍토는 바람직하지 않다.
허접한 여론조사가 몰고 온 오늘의 대선 풍경이 퍽 낯설고 보기조차 역겹다. 권력을 쥐려는 자와 그를 따르며 알랑거려서 일이 잘되면 권력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여 잇속을 챙기려는 무리의 준동은 더욱 불쾌하다. 그런 자들이 입으로는 공정과 평등을 말하면 과연 믿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가 최근에 겪어본 세상은 문자 그대로 급변하고 있다. 한 번 잘못하면 그냥 나락으로 떨어지는, 지도자의 순간 판단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요즘이다. 실패하고 재도전하는 청춘의 모험이 아니라 한 번 실수하면 숱한 생명이 사라지거나 나라 전체가 파탄에 이를 수 있는 살얼음 위의 실전이다.
대통령의 결단은 재수(再修)를 용납하지 않는다. 가면서 배울 수도 없고 실험을 할 수도 없는 위험한 자리가 대통령직이다. 기분으로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는 자리다. 재빠른 판단과 섬세한 안배를 할 수 있는 인물을 찾아 맡기는 게 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