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를 모신 지 1년 정도 지났다. 어머니는 25년 전에 맞벌이하는 아들 내외 대신 손자를 돌보기 위해서 농사마저 접고 작은 아들네로 가셨다. 지금 어머니 연세가 여든이니까 내 나이쯤 되었을 무렵이다.
작은아들과 살면서 손자만 돌봤을까? 평소에 부지런하고 깔끔하신 분이니 집안일도 거들며 바쁘게 사셨을 것이다. 그러다가 손자는 성인이 되어 제 갈 길을 찾으니 어머니의 설 자리가 줄었고 종일 덩그러니 혼자 남아 집이나 지키는 날이 길어져 우울증 심해지셨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 19로 인하여 그나마 여가를 즐기시던 복지관도 못 나가시고 노인정마저 폐쇄되어 말동무도 못 만나게 되어 감옥살이 아닌 감옥살이를 하고 계셨다.
TV 뉴스에서는 날마다 코로나 19 확진자며 사망자 소식으로 도배를 하니 불안하셨는지 우울증이 점점 심해졌다. 어느 날은 배가 아프다고 또 어느 날은 머리가 아프다고 또 어느 날은 가슴이 뜨겁다는 등 아픈 부위는 랜덤으로 발생하였다.
이 병원 저 병원 다 다니며 진료를 받았지만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 어머니는 자꾸만 아프다고 하시니 같이 사는 아들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결국은 병원에서는 굳이 안 해도 된다는 코로나 19 검사까지 받고 나서야 환경을 좀 바꿔드려 보자는 의미로 2주간만 우리 집에 와 계시기로 한 것이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간다.
여기는 시골이라 집 밖에만 나가면 사람도 만나고 모정에 나가 앉아 마스크를 쓰고라도 어머니가 좋아하는 수다도 떨 수 있으니 아픈 것도 잊고 2주일이 훌쩍 지나갔다. 어느 날 어머니는 여기서 살면 안 되냐고 내게 물으셨다.
나는 모실 자신은 없었지만, 어머니 편할 대로 하시라고 대답했고 며칠 후 어머니의 짐이 우리 집으로 옮겨졌다. 물론 자식이니까 모셔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머리로는 인정하면서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매사가 불편했다.
어른을 모시는 일인데 어찌 물건들이듯 말 한마디 툭 던져놓고 일사천리로 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얼른 이해할 수 없었다. 적어도 직접 모시며 부대껴야 하는 나한테만큼은 이해를 구해야 하는 일이 분명한데 어찌 일언반구도 없이 아들들끼리 전화로 몇 마디 주고받고 모셔올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섣불리 따지거나 불만을 이야기하면 모시기 싫어서 그런 것처럼 비칠 것이기에 나 혼자 속앓이만 했다. 가수 나훈아 님이 저세상으로 가고 없는 소크라테스 마저 소환해 세상이 왜 이러냐고, 내 삶이 왜 이러냐고 노래로 물었듯이 나도 누군가를 붙잡고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다면 이렇듯 답답하지는 않을 일인데 함부로 드러내 말할 수도 없으니 이 속을 누가 알랴.
어머니는 술을 좋아하신다. 전주에 계실 때도 술을 드시고 침대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져 수술을 받고 몇 달을 고생하셨다. 그런데 이곳에 오셔서도 날마다 술을 드셨다. 물론 술을 드시는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한두 잔 즐겁게 드시는 것은 기분전환도 되니 그냥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어머니는 좀 과하실 때가 많다. 못 마시게 하니 숨겨놓고 마시다가 아들한테 들킨 적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장실에서 넘어지셔서 허리뼈 골절로 시술을 받아야 했고 지금은 허리 보호대를 차고 로봇처럼 사신지 또 두 달째다. 나는 퇴근하면 옷도 못 갈아입은 채 저녁밥부터 한다. 어머니가 시장한 걸 못 참으시는지 밥상을 챙기기도 전에 식탁에 앉아계시는 일이 잦아서 마음이 더 조급해진다.
반찬 한 가지라도 새로운 걸 만들어야 하고 국도 끓여서 따듯한 밥상을 차려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이다. 갱년기와의 전쟁도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얼떨결에 모시게 된 시어머니로 말미암아 내 삶의 고개가 한결 가파른 느낌이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번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한다.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지금 내 처지가 딱 그렇다. 슬기로운 갱년기 생활에 이어 어떻게든 슬기로운 시어머니 모시기를 해야 하는데 이번 과제도 녹록지 않다.
어머니는 여기저기 아프다는 말씀을 달고 사신다. “이렇게 살아서 뭐 하냐? 빨리 죽어야 하는데 ” 하시면서도 약은 시간 맞춰 꼬박꼬박 챙겨 드시는 어머니, 오늘 아침엔 출근하는 나보다 먼저 동네 의원으로 가시는 어머니, 100세까지는 거뜬히 사실 것 같은 어머니, 그러나 불편한 마음가짐에 이런 자세로 모시다 보면 내가 더 지칠 것은 뻔한 일이다.
결국은 내가 마음을 바꿔먹었다. 모시고 사는 게 아니라 같이 사는 것이라고. 바쁠 때는 식은 밥으로 볶음밥도 해드리고, 때로는 빨래도 걷어달라고 부탁드리고 때로는 청소기도 돌려달라고 하고 힘들면 힘들다고 울어도 보며 함께 보금자리를 가꾸며 살아봐야겠다.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과일과 찬거리가 가득 차 있다. 식탁 위에는 쪽지와 만 원짜리 몇 장이 놓여있다.
“ 며칠 후면 네 생일이지? 쇠고기라도 사서 미역국 끓여 먹어라.” 메모를 보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내가 출근하고 없는 사이 백강님 여사가 다녀가신 게다.
내 휴대폰에 백강님 여사로 입력된 분, 그분은 바로 시어머니다. 일흔이 넘으신 어머니의 함자를 함부로 부르면 되느냐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몇 년째 백강님 여사를 고집한다.
‘누구 부인’, ‘누구네 엄마’, ‘누구네 할머니’로 사시지만, 분명히 백강님이라는 이름이 있지 않은가. 이는 내가 친정어머니를 박정옥 여사로 부르면서 시작된 나만의 애정 표현이다.
어머니께서는 공무원인 작은아들 내외보다 큰아들을 상대적으로 아픈 손가락으로 느끼시는 것 같다. ‘아이들 키우며 살다 보면 언제 과일 한번 제대로 사 먹을 여유나 있겠냐?’ 하시며 가끔 오셔서 냉장고에 이것저것 채워두고 가셨다. 」
오래전에 쓴 수필 속에서 어머니의 마음을 소환해 보았다. 그리고 가수 나훈아 님이 애타게 테스 형을 불렀어도 얻지 못한 답을 찾아냈다. ‘내 자식들에게 해주기 바라는 것과 똑같이 부모에게 행하라’는 테스 오빠의 생전 말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