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메모리를 꺼내서 컴퓨터에 연결하고 포토샵에서 사진을 열었다. 그리고 얼마나 수정을 해야 할지 살펴보려고 확대해보았다. 모니터 속의 얼굴, 60여 년 전부터 보아온 그 얼굴이다. 그 얼굴에 그렇게 주름살이 많고 검버섯에 잡티가 널려있는 줄은 그때 처음 알았다. 늘 얼굴을 맞대고 밥 먹고 술 마시고 함께 어울리던 그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마음이 심란해져서 컴퓨터를 껐다.
그 주름살과 잡티와 검버섯, 상처와 크고 작은 검은 점이 가득한 얼굴은 그들의 얼굴이지만, 내 얼굴이기도 했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조차 듬성듬성해서 사진으로 만들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의 더께가 무겁게 느껴지는 눈꺼풀과 눈자위, 눈썹에도 흰 털이 반이나 섞인 얼굴은 우리가 살아온 시절의 힘겨운 여정을 고스란히 그려주었다.
인생 70 고래희(古來稀)라던 70살을 훌쩍 넘어 80살에 거의 가까운 나이부터 최소 희수(喜壽)라는 나이에 이른 그들이다. 언제나 만나면 아이들처럼 장난치고 욕설이 튀어나와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그런 친구들의 얼굴을 카메라 렌즈를 통해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그들의 세월과 시련을 읽으며 마음이 아렸다. 더구나 그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만들기로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매크로렌즈를 이용해서 아주 작은 꽃이나 곤충, 우리가 눈으로 보기 어려운 피사체를 촬영하는 취미를 갖고 있다. 그 작은 세계를 정밀 매크로렌즈로 촬영해 보는 재미는 신대륙을 찾아간 콜럼버스가 발견한 세계보다 더 신비하고 아름답다. 내 그런 취미활동을 아는 친구 한 명이 그런 것만 찍지 말고 이제 우리도 영정사진이 필요할 때가 되었으니 만들어주는 게 어떻냐고 제안을 해왔다.
오래전에 예술단체 사진 분과를 맡아 벽지와 외딴 섬 지역 노인들의 영정사진 수천 장을 만들어주었던 봉사활동 경험도 있어서 몇 명의 사진이야 가볍게 만들 수 있을 거 같아 쉽게 승낙했다. 뻣뻣하게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보다는 자연스러운 사진을 원하는 친구들을 데리고 공원엘 찾아가 나름 자연스러운 사진을 담았다. 그런데 촬영한 사진을 여는 순간, 그들이, 바로 내가 이렇게 쪼그라지고 늙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기운이 쪽 빠져나간 것이다.
그 사진에는 내가 없었지만, 그들의 얼굴이 바로 내 얼굴이라는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허전하고 슬펐다. 노인, 세상에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이고 거치적거리는 잉여 인간이라는 인식이 넘치는 건 알고 있었지만, 평소 거울도 잘 보지 않는 나는 아직도 쉴 새 없이 활동하면서 내 얼굴이 그리도 엉망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아직도 설레는 마음이 있고 가슴이 콩닥거릴 줄도 아는, 그런 나는 어디에도 없고 칠면조 머리처럼 주름살에 비틀린 목과 다 빠져나간 머리카락이 듬성듬성한 모습이라니…. 그 뒤에 한 주일 동안은 사진을 열어보지 않았다. 현실을 부정해서가 아니라, 그 아픈 흔적들을 어느 정도 지우고 꾸며서 추한 모습보다는 인자하고 그리운 사람으로 만들어야 하는 어려움 때문이다.
장례식장에 가면 영정사진이 있지만, 하나같이 엄숙한 표정에 멀뚱한 표정을 보여주고 있어 생전의 고인 모습을 보기 어렵다. 사진을 만들어달라던 친구의 요청이 바로 그런 얼굴이 아닌 평소 모습을 남은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다는 여망이었다. 개구쟁이 친구는 조금 익살스런 모습이 담긴 사진을 만들어야 하고 친구마다 지내온 삶을 사진에 드러내고 싶은데 사진은 겨우 모습만 잡아놓았으니 고심을 하는 것이다.
다음 주말에 다시 친구들을 모아 사진을 촬영했다. 다른 장소에서 조금이나마 좋은 사진을 찾을까 해서다. 저들끼리 떠들며 놀게 하고 틈새에서 표정을 잡아 촬영을 마쳤다. 그리고 밤에 사진들을 열었다. 그렇게 쉽게 80년 가까운 세월을 잡아낼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역시 비슷한 수준의 사진만 잡혔다. 얼굴을 꾸미고 만드는 거라면 쉬울 터이지만, 사진에 그들의 삶을 드러내 주려니 어려운 것이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마저 몇 가닥 남지 않은 민둥산 수준의 머리, 우리가 살았던 그 무지막지하고 터무니없던 시대를 견뎠으니 머리카락인들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친구들은 나름 좋은 직장과 사업을 꾸려왔던 사람들이다. 바닥 생활을 한 것도 아닌 그들인데도 그 얼굴은 여느 얼굴과 다르지 않았다.
유복하게 산 친구나, 제법 고생을 했던 친구나, 늙어 쪼그라진 얼굴은 별반 다르지 않다. 생의 불꽃이 거의 사그라져 힘을 느낄 수 없고 겨우 살아온 시간의 훈장만 가득한 얼굴이다. 공통으로 보이는 건 시간의 흔적뿐, 그가 가진 것도 남긴 것도 얼굴에 쓰인 건 없었다. 늙어 헐헐거리는 시베리아의 호랑이처럼 그르렁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그냥 ‘노인’이라는 이름만 보였다.
돌아갈 때는 아무것도 쥐고 갈 수 없는 빈 몸이 될 그들과 나. 어머니의 자궁에서 생명으로 잉태되어 세포분열을 시작할 때부터 영정사진의 모습만 남기고 떠날 것을 계약했기에 오늘 허허로운 마음으로 마지막 죽음 뒤의 퍼포먼스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영정사진을 만든다는 말에 저마다 안 입던 양복저고리를 입고 듬성듬성 터럭이 남았지만, 면도도 하고 나왔다.
남아 그리워할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을 남기겠다는 열망은 생에 대한 애착이나 미련이 아니다. 단 몇 초의 짧은 순간에 자신을 기억하게 할 마지막 수단으로 좋은 느낌의 얼굴을 그려놓겠다는 작은 소망이다. 그리하여 한 번 더 기억 속에서 불려 나올 수 있고, 그리운 얼굴로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일 게다.
다시 컴퓨터를 켜고 사진을 열어 얼굴에 가득한 주름과 검버섯을 지우고 조금은 탄력있게 보이는 얼굴로 고쳐 본다. 내가 지우는 잔주름 하나하나가 삶의 흔적이고 아픔이었을 걸 생각하며 그들의 시간과 내 시간을 지워갔다. 그렇게 시간을 지워 조금 젊어진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포토샵 ‘복구 브러시’로 내 아픈 시간을 지워 그리운 이들을 만날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