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는 우체통에 넣는 순간, 답장을 기다리는 설렘이 시작된다. 못다 한 사연일지라도 편지에는 마음 편히 다 쓸 수 있다. 쑥스러운 말도 용기 내어 담을 수도 있고, 깊은 생각을 보여줄 수도 있다. 편지는 우체통과 집배원의 손길을 거치면서 하염없이 느리게 상대에게 전해지기 때문에 느림과 기다림에 익숙해져 사연을 더 숙성시키고 긴 여운을 남긴다.
돌아보면 나도 꽤 많은 편지를 썼다. 초등학교 때는 ‘국군장병 아저씨께’로 시작했던 위문편지에서부터 자취생 시절에는 가끔 부모님께 썼던 안부 편지, 그리고 구구절절 시나 노래 가사를 인용하며 썼던 펜팔, 특히 짝사랑하던 사람한테 보내놓고 답장을 기다리던 그 시간은 왜 그리도 길고 설레었던지…. 요즘 우리는 e메일이나 문자메시지, 또는 카카오톡으로 실시간 안부를 묻는 빠른 소통의 시대에 산다. 소통이 빨라진 대신 가슴은 더 삭막해지는 듯 푸석하다. 너무 빠른 정보와 글자로만 보이는 말들이 가슴에 담기지 않고 스치듯 지나쳐버리는 스피드 시대의 건조한 습성 때문이다. 물론 나도 낮은 기계음과 죽은 활자들이 건조한 안부를 물으며 너무나 빠른 소식에 익숙해져 살아가지만, 아직은 삐뚤빼뚤한 손글씨로 주고받는 소식이 정감이 간다. 조금은 느려도 그 손글씨에는 누군가의 온기가 그대로 남아 가슴에 정(情)으로 남는 게 있어 좋다.
문인인 소원님은 펜팔로 인연을 맺어 결혼까지 성공해서 35년째 살고 있다며 펜팔 예찬에 침이 마르신다. 나는 십여 년 전 임실군 편지쓰기 대회에 참가하여 친정어머니께 편지를 써서 상도 받았고 문인협회에 입회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편지는 어머니께 전달되지 못했다. 편지를 부치기도 전에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래서 한동안은 편지 쓰는 것이 두려웠다. 편지는 설렘도 있지만, 가끔은 아픔도 동반한다.
그처럼 좋아하는 편지를 오랜만에 원 없이 썼다. 바로 아들에게 쓴 편지다. 아들이 특전사 부사관 임관을 앞두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교육대대에 입소했었다. 아무리 통신이 발달 된 세상일지라도 훈련 중에는 전화나 컴퓨터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다. 15주 훈련 기간 거의 매일 썼으니 150통은 족히 되리라. 아들은 임관식이 끝나고 그 편지를 신줏단지 모시듯 집으로 가져왔다.
처음 교육대에 입소하여 2주 동안은 다음카페인 특수전 교육단 부사관 교육대 카페에 가입하여 온라인 편지를 써야만 했다. ‘200기 3소대 2분대 199번 신동직에게’로 시작한 편지를 써 올리면 교관들이 출력해서 후보생들한테 전달한다고 했다. 200기 엄마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편지를 썼고 날마다 페이지가 넘어갈 정도로 편지 방은 그리움으로 도배가 되었다.
그러던 중 “부모님들 애들 잘하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건강히 잘 계십시오.” 교관으로부터 군기 바짝 든 분대 단체 사진 한 장과 함께 문자메시지가 왔다. 나는 사진과 문자메시지를 카페에 올렸고 댓글은 순식간에 굴비 엮이듯 달렸다. 너무 작아서 알아보지도 못하는 사진을 놓고 서로 자기네 아들은 찾아낸 모양이다.
“맨 앞 왼쪽 두 번째 안경 쓴 아이가 제 아들이네요”
“우리 아들하고 같은 분대인가 보네요. 책상에 두 손을 올려놓은 아이가 우리 아들 이근효입니다.”
“오른쪽 두 번째 울 아들이네요. 신덕창”
“저도 어제 이사진 보고 울었어요. 휴대전화로는 작아서 잘 안 보였는데 이렇게 크게 올려주시니 감사합니다! 맨 끝 오른쪽 울 아들 심연준입니다.”
나도 질세라 남편과 함께 컴퓨터 앞에 머리를 맞대고 앉아 숨은 그림이라도 찾듯 아들을 찾아냈다.
“맨 왼쪽에 파란 이름표 보이는 머리 큰 아이가 제 아들 신동직이에요.”
댓글을 남겼고 퇴근만 하면 컴퓨터 앞에 앉아 ‘또 누가 좋은 소식이라도 올려놓으려나?’ 기대하며 온라인 편지를 썼고 다른 후보생 엄마들이 올려놓은 편지에 댓글을 달며 동병상련의 그리움을 달래던 중 드디어 카페에 우편으로 편지를 써도 된다는 공지가 떴다.
나는 여고 시절 이후 처음으로 꽃 편지지를 샀고 우표도 한꺼번에 50장을 샀다. 그리고 저녁마다 연애편지를 쓰듯 편지를 쓰고 출근하는 길에 우체통에 넣는 것이 일과가 됐다. 우체통에 편지가‘통’하고 떨어지는 순간부터 내겐 설렘이었다. 그렇게 날마다 편지를 보내고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받는 답장을, 편지지가 다 닳도록 읽고 또 읽었다. 지독한 짝사랑이었다.
「듬직한 아들 동직아!
요즘처럼 너의 하루가 궁금해지고, 사랑한다는 말을 밥 먹듯이 하고 너 생각에 밤마다 뒤척이는 날이 있었던가 싶다. 그렇지만 엄마는 많이 걱정하지 않으련다. 내가 누구더냐? 뭣이든 한다고 마음먹은 일은 어떻게든 해 내는 장한 아들 아니더냐?
그래도 “존버정신을 잃지 마라.” 존버정신이 대체 뭐냐고?
소설가 이외수 선생님 알지? 그분이 트위터에서 청년들한테 자주 올리는 응원의 메시지인데 존 나게 버티는 정신이래. 그래 동직아! 너도 그래 보자. 날마다 계속되는 더위도, 고된 훈련도.
네가 설계한 인생의 길이니 당당히 걸어가자.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즐기면서 가자고 엄마가 늘 말했잖아
사랑하는 김 여사가~」
이렇듯 그 어떤 현란한 미사여구도 필요 없고 그 어떤 고상한 철학으로 포장하지 않아도 그 자체만으로 X레이 사진처럼 서로의 마음은 고스란히 드러내는 게 편지다. 지금이야 자동차로 가면 한 시간 남짓한 거리에서 근무하고 언제든 전화로 목소리도 들을 수 있고 문자메시지로 빠른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으니 전처럼 그리움은 덜하지만, 나는 여전히 ‘대한민국 특전사 신 중사 보아라.’라고 시작되는 편지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