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여름은 그리움이다. 무엇 하나 꺼릴 것 없는 완벽한 자유,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살 수 있었던 시간을 딱 두 글자로 말한다면 ‘여름’이다.
거기에 방학이라는 단어를 더하면 세 글자로 변한다. 바로 ‘내 세상’이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던 나만의 시간, 방학 숙제 따위는 하루면 다 해치웠다.
일기도 달력에 날씨만 표해두었다가 한꺼번에 다 썼다. 그때부터 내 영혼은 자유라는 단어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았다. 그때 속박을 거부하고 틀에 매이기 싫어하는 자유 영혼이 심어졌다.
그 자유라는 단어는 모든 것을 풍화시킨 시간의 조화 속에서도 조금도 줄어들거나 물러지지 않고 내 기억에 살아있다. 줄줄이 세 살, 두 살 터울의 4형제 가운데 막둥이였던 나는 무서운 아버지의 철권통치 아래서도 기죽지 않았고 형들의 폭행과 견제 속에서도 할 말을 다 하는 입만 산 딱따구리였다.
전주 노송동에서 살다가 교동으로 이사해서 처음 만난 전주천은 진정한 천국의 놀이터였다. 그때가 내 평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지 싶다. 전주천은 물에 들어가 본 적도 없는 나를 물개로 만들어주었고 피라미낚시, 고기 잡는 병을 놓아서 잡거나 몰아 잡는 기술도 가르쳐 주었다.
밤에는 석유 솜방망이를 만들어 밤고기를 잡거나 헌 가마니에 쇠똥을 넣어 여울에 묻어두면 뱀장어 미꾸라지가 들어가서 쉽게 잡는 법도 배웠다. 어디 그뿐인가? 가을이면 싸전다리 밑에 참게 발을 치고 참게 잡는 노인이 새벽녘에 잠들었을 때, 살그머니 게가 들어가는 바구니를 털어오는 나쁜 재미도 가르쳐 주었다.
내 세상이던 여름방학은 ‘해방’이고 ‘자유’였다. 집에서 조금 가면 맑은 물이 흐르는 전주천에 피라미, 마자, 붕어, 메기, 쉬리, 뱀장어, 참게까지 온갖 물고기가 시글시글했다. 마치 내가 낚싯대나 작살, 고기 병을 들고 잡으러 가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여름내 피라미낚시, 작살질로 물고기를 잡았다. 고기를 낚다가 더워지면 훌러덩 벗고 물에 들어가 입술이 파랗게 될 때까지 헤엄치고 물장난하며 놀았다. 여름 장마에 큰비가 내리면 산에 나무가 없던 때라 금세 큰물이 져서 전주천 중단까지 붉덩물이 흘렀다.
돼지가 떠내려 오고 달기장태가 송두리째 넘실거리는 물을 타고 흘러왔다. 사람들은 장대에 삼각망을 만들어 떠내려 오는 것들을 건지거나, 냇물 가장자리를 훑으면 제법 큰 고기까지 걸려 나왔다. 물살이 세어 가장자리에서 급류를 피하는 고기를 건져 올리는 방법이다. 그렇게 큰물이 흐를 때에 나는 중학생이던 작은형을 따라 겁 없이 붉덩물에 뛰어들어 전주천을 헤엄쳐 건너기도 했다.
5월 연휴 끝 무렵에 아이들과 가정의 달 의미로 점심을 먹고 집에 돌아와 카메라를 짊어지고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딱히 갈 데가 있어서가 아니라, 아이들과 헤어지면서 엄습하는 ‘외로운 느낌’ 때문이다. 난 가끔 마음이 외로우면 어릴 적 놀이터이면서 진정한 고향인 전주천을 찾아간다.
지금은 어렴풋한 모양뿐 이어도 내가 놀던 그 물가에 앉아있으면 오래된 자유의 느낌과 즐거움이 나를 달래준다. 내가 사는 효자동은 아직도 타향이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에 서로 만나기도 어려웠던 마음이 조금 풀려서인지 천변 길에 산책하는 사람들이 조금 늘었다. 삼천 우림교 아래로 내려가서 산책로를 따라 전주천을 향해 달렸다. 길섶에 핀 작은 꽃들을 유심히 살피며 가느라 속도를 내지 못했지만, 오랜만에 천변 산책로에 들어선 것만으로도 뿌듯하다.
고향에 갈 때 기차역에서 열차표를 사면서부터 마음은 이미 고향에 가 있듯이, 자전거 페달을 밟는 발짓이 가볍다. 달리다가 길섶에 핀 작은 꽃을 새롭게 발견하여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또 한 번 나오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효자동이나 구이면 근처에서 볼 수 없었던 작은 풀꽃 여러 종류를 발견해서 기쁨이 두 배가 되었다. 작은 풀꽃을 촬영하면서 여러 차례 놀라고 감탄했던 건 그 작은 꽃에도 꽃받침에서부터 꽃잎과 암술과 수술까지 있을 건 다 있을 만큼, 자연은 공평하고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연은 인간이 함부로 건드리고 바꿀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작은 꽃을 통해 내게 가르치고 있었다.
사진을 찍고 한눈을 팔아가며 가다가 전주천으로 들어서는 길목을 지나쳐 노송천 복개지역으로 들어갔다. 전주천변길을 벗어난 것이다. 내친김에 기린로를 따라 멀리 돌아서 교동으로 향했다. 내가 살던 집터에 들어선 한옥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전주천 한벽당에 이르렀다. 맑은 물이 어제(魚梯)를 따라 넘치는 산책로 난간에 자전거를 세우고 맑게 흐르는 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아스라한 시공간을 더듬었다.
내가 서 있던 그 자리는 급류에 제방이 무너지는 걸 막기 위해 견칫돌을 쌓고 시멘트 기둥으로 마감해놓았던 곳이다. 그 위에 옷을 벗어놓고 고추를 달랑거리며 물속으로 뛰어들던 우리들의 수영장이었다. 물이 휘도는 지역이어서 아이들 키를 훌쩍 넘길 만큼 깊었다. 가끔 익사 사고도 나고 구조물에 다치기도 했지만, 요즘 부모들처럼 호들갑스럽지 않아서 그 물에서 노는 걸 말리지 않았다.
아이들이 즐거움에 겨워 목청껏 지르는 소리, 물속에서 크고 작은 고기들이 돌 틈에서 요리조리 숨으며 작살을 비웃던 기억까지 65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 물에서 함께 놀던 동무들, 날 물개로 만들어준 작은형, 내게 낚시를 알게 해준 매운탕 집 아저씨, 여름은 왔는데 누구 하나 이 세상에 남아 함께 추억할 사람이 없다.
후미진 삶을 사느라 늘 허기진 마음으로 버둥대다가 그 소중한 사람들이 다 저세상으로 떠난 뒤에야 텅 빈 고향을 안타까이 찾는 어리석음이여. 몇 번이나 한벽당을 찾아갔지만, 함께할 그들이 없으니 아픔만 한가득 안고 돌아올밖에…. 공유하지 못하는 추억이 얼마나 부질없고 허룩한 것인지 누가 알까. 늘 그립고 가슴이 뛰지만, 가보면 더욱 혼자인 것을 절감하는 그 곳. 그래도 전주천 한벽당 아래에서 처음 보는 작은 풀꽃 ‘큰멀칭개나물’을 만난 건 큰 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