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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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주일보
  • 승인 2019.07.18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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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김 고 운 /수필가
김 고 운 /수필가

타는 듯 목이 마르고 입안이 껄껄한 데다 텁텁하다. 가까스로 정신 줄을 가다듬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물을 틀어 입을 헹구고 목구멍에 낀 가래인지 뭔지를 열심히 캑캑거려 뱉어냈다. 그리고 시원하게 몸에 고인 물을 쏟아냈다. 오매!, 시원한 것. 화장실에서 나와 벽시계를 보았다. 시침과 분침이 거의 일직선인데, 한쪽은 10을 조금 지났고 한쪽은 4자를 조금 지난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새벽 5시 가까운 시간인 듯싶다. 스마트 폰을 집어 들었다. 10 : 22라는 숫자가 보인다. 술에 떨어져 겨우 한 시간 남짓 잔 셈이다.

또 헛짚었다. 전등을 켜고 냉장고에서 콜라 깡통을 꺼내 목을 축인다. 다시 시계를 본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생각한다. 맞다. 그 악당 놈들에게 오늘도 당했다. 제 놈들이 술을 제법 마실 줄 안다고 나만 보면 주졸이니, 밀밭에만 가도 취하는 놈이니 하며 날 도발하여 변비에 좋은 막걸리라며 권하던, 친구인지 웬수인지 모르는 그 못된 인간들에게 또 당한 것이다.

하긴 그 인간들만의 잘못이겠는가. 꼬인다고 따라가서 못 먹는 술을 마시는 덜떨어진 내가 더 문제일 것이다. 오랜만에 만나 저녁이나 먹자던 중고등학교 동창생들, 집 나이로 76, 77살이 된 악동들은 지금도 모이면 갖은 욕설에 서로 저 잘났다고 입에 거품을 문다. 아직도 만나면 16, 17살 시절로 돌아가는, 이 동네 말로는 깨복쟁이 친구들이다.

둘 가운데 하나, 늘그막에 가곡 교실에서 노래를 배워 제법 박자는 잘 맞추어 부르는 친구가 내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밥을 사겠다고 날 불렀다. 노래래야 나무로 만든 톱으로 바위를 썰면 그런 소리가 나나 싶게 껄껄한목소리로 부르는 가곡발표회를 곧 하는데, 나더러 그 장면들을 촬영하여 동영상을 만들어 유투브에 올려달라는 부탁이다. 우리보다 더 나이가 많은 할매 · 할배들이 대부분이어서 소리는 갈라지고 찢어지고, 박자는 제멋대로인 가곡발표회다.

벌써 여러 차례 그 가곡발표회장에 가서 녹화를 해주었다. 부르는 이는 안간힘을 다하지만, 소리는 목 안에 잠겨 가까스로 스피커를 비집고 나오는 노래들. 잘 들리지 않는 소리를 키우고, 중국 경극 배우처럼 덕지덕지 화장품을 바른 얼굴을 고쳐서 예쁘게 해주는 일도 내 몫이다. 매년 봄 · 가을에 빠짐없이 치르는 발표회를 녹화하며 해가 갈수록 부르기 힘들어지는 노래임을 실감하지만, 정작 부르는 이들은 언제나 삶에서 마지막 노래인 듯 온 힘을 다 쏟아낸다. 아직도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걸 위안 삼는 그 막바지 안간힘을 보는 일은 눈물겹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하다.

그들이 안 나오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일이나, 내가 못 먹는 술을 기를 쓰며 먹는 일은 어쩌면 삶의 끝자락에 선 늙은이의 측은한 발버둥일 것이다. 그들이 깨지고 늘어진 목소리로 박자와 음정조차 제멋대로 내지르는 까닭은 아직 살아있다는 자부심과 할 수 있다는 자랑일 것이다.

지난날에는 깜냥으로 고운 목소리와 아름다운 몸매, 핑핑한 얼굴로 불렀을 그 노래들이 세월에 깨지고 부서져 오늘에 이르렀음을 짐작하는 그 가곡발표회. 털털거리는 고물 오토바이 소리처럼 아무리 좋게 들어주려 해도 듣기 거북한 음성이 대부분이지만, 그들의 노력은 가상한 데가 있다.

하지만, 막걸리 딱 한 병조차 벅찬 주량인 내가 소주 두 병 정도는 쉽게 마시는 술꾼과 어울리는 일은 맥락이 다르다. 내가 마시는 막걸리는 아무래도 무리이다. 변비에는 분명히 도움이 되는 듯한데, 술을 분해하는 효소라는 게 없는 내 몸에 들어온 막걸리는 분해되지 않고 한참 동안 행패를 부리다가 마시는 물에 희석되어 소변을 통해 나간다. 그런 내 몸 사정을 잘 알면서도 악당 녀석들을 만나면 귀신에 홀린 듯, 못 이기는 척, 막걸리 사발에 손이 간다.

아직도 술기운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이런 글을 적고 있는 짓도 어쩌면 안 나오는 목소리로 제멋대로 부르는 그들의 노래처럼 내 나름의 안간힘이다. 도대체 소화하지 못하는 술을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억지로 마시고 이처럼 한밤에 깨어 속을 다스리다가 뭔가 한 마디 적을 거리가 잡혔다는 심산으로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마음은 모두 비슷하지 않을까?

찰나(刹那)의 인생이라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한 중생의 70년은 제법 길었다. 돌아보는 시간은 엊그제인 듯하지만, 겪고 있는 고뇌의 시간은 무겁고 지겹다. 요즘 한 달여 동안 마음고생을 하고 있다. 글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어쭙잖은 잡문만 쓰일 뿐, 글다운 글이 나오지 않아 속을 태운다. 동아리 회원들에게는 이러이러한 글을 써야 한다고 채근하면서 정작 내 글을 쓰려면 손에 잡히는 그 무엇이 없다.

좋은 책을 읽고 남의 글도 많이 보고, 공원으로 거리로 나가 걷기도 하면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글의 벼리를 더듬고 있다. 가끔 밤에 굵은 땀을 흘리며 자전거를 타는 일도 손아귀에서 미끌미끌하게 빠져나가는 글의 벼리를 잡는 아귀힘을 얻고자 해서다. 조금만 더 일찍 이 길에 들어섰더라면 내 언어들을 부리고 끌어내는데 이처럼 궁싯거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후회도 한다.

이래도 저래도 뭐가 잡히지 않으면 어제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못 먹는 술을 마셔보지만, 그 결과는 뭔가 잡기는커녕 이 새벽에 깨어 배가 차오르도록 물을 마셔서 술기운을 몰아내는 게 고작이다. 글의 벼리를 잡지 못해 느끼는 갈증이나, 막걸리 몇 잔에 떨어져 자다가 깬 갈증이 다른 것인지 같은 것인지조차 모르는 채 곧추앉아 모니터를 바라보다 새벽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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