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갈 때 못 본 것
올라갈 때 못 본 것
  • 전주일보
  • 승인 2019.02.21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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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김 영 숙/수필가

휴일이면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산으로 간다. 가벼운 마음으로 간다지만, 물 한 병, 커피 몇 잔, 수건, 비상 약품 등등 단 몇 시간 집을 떠나는 데도 챙길 것이 많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렇듯 짊어지고 산을 올라도 내려오는 길은 언제나 홀가분하다. 처음에는 살을 빼는 게 산행의 목적이었는데 이제는 일상이고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무성한 숲이 드리운 그늘, 나뭇잎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조각 하늘, 신선한 공기, 이런저런 풍경이 자꾸 그리워지니 말이다.

산은 삶의 배움터다. 산행하다 보면 구슬땀 흘리며 올라야 하는 가파른 길을 만나기도 하고 평탄한 능선 길을 만날 때도 있다. 때로는 코가 땅에 닿을 만큼 허리를 숙이기도 하지만, 정상에 오르면 천하를 발아래에 두고 허리를 펴 호연지기에 젖어볼 수도 있다. 항상 어렵거나, 힘들지 아니하고, 늘 평온한 그런 것도 아니다. 침묵으로 맞는 고즈넉한 산사에서 심신을 쉬게도 하고 세월과 비바람에 깎이고 닳아 넓어진 바위가 우리네 휴식을 위해 기꺼이 제 몸을 내어주는 넉넉함도 있다.

힘들면 다음 길은 편하겠지 기대도 하고 편안한 길에서는 천천히 살피고 갈 여유도 얻는다. 정상에 올라도 더 높은 산의 정상을 볼 수 없고 맞은편 봉우리만 또렷이 볼 수 있듯이, 내 삶의 중심에서 한 발짝만 물러서서 바라봐야 진정한 내 모습이 보인다는 것을 배우기도 했다.

산은 쉽게 그 속내를 다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가 겸손한 만큼만 맛을 보인다. 골 깊은 계곡 물소리에 마음 씻고 산새 소리에 생명의 소중함을 배운다. 바람결에 볼 비비며 산의 정취에 동화되는 것은 오로지 오르는 자만의 몫이다. 계절마다 보여주는 맛도 다르다. 연둣빛 새순의 신선함을 맛보게도 하고 신록으로 가득 찬 넉넉함도 보여준다. 울긋불긋 멋을 낼 줄도 알며 그 모든 영화를 다 내려놓아 비움으로 다시 채울 수 있음도 몸소 보여준다.

산을 오르다가 가끔 뒤를 돌아본다. 언제 저 길을 왔을까 까마득하다. 그러나 내가 걸어온 길 아니던가. 너무 힘들어 더는 오를 수 없어 포기하고 싶다가도 뒤를 보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수 없다는 오기가 생긴다. 위로 오를수록 산행 조건은 열악하고 체력은 떨어지고 바람이 거센 날도 있지만, 또 어느 한 시점만 넘기면 숨을 고를 수 있는 능선이 아니던가.

어렵게 정상에 올라 가슴 가득 숨을 들이쉰다. 폐 속까지 상쾌하다. 눈앞에 부챗살처럼 펼쳐진 능선은 또 얼마나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게 안아주는지. 부지런히 키 높인 크고 작은 봉우리는 얼마나 설렘을 주고 도전해보고 싶은 희망을 주는지.

머리 위로 구름 몇 조각이 유유자적 지나간다. 우리도 저렇게 지나가리라. 가뭇없는 시간 속 어디쯤에서 점 하나 찍는 일 하나가 산의 품이라는 것이 좋다. 산정을 요 삼고 하늘을 이불 삼아 산정에 누우니 보이는 만큼이 내 정원이요, 발길 닿는 곳이 다 내 안식처이거늘 어찌하여 몇십 평 집 한 채 얻기 위해 아등바등 한걱정에 씨름했을까?

머리 위로 곱게 햇살이 부서지는 정상에 앉아 배낭에 담아온 커피 한 잔에 과일 몇 조각으로 허기를 채우는 여유는 또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 어떤 찻집이 이보다 너른 정원을 가졌으며 그 어떤 풍경화가 이를 대신할 수 있을까? 그러다 보면 어느새 배낭을 가벼워지고 내려오는 길은 한결 가볍다. 이고 지고 간 것이 아까워서 버리지도 못하고 내려놓지도 못하고 망설이다 보면 오히려 내려오는 길은 올라가는 일만큼이나 고되고 힘든 고행의 길이 됨을 배운다.

산에서는 자연을 따르며 어울림과 겸손의 길을 걸어야 한다. 자만하면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이 따르기도 한다. 나지막하다고 만만하게 봤던 성수산에서 발을 헛디뎌 발을 삔 적도 있고, 내장산 장대봉의 철 계단에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고소공포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겸손하면 생각지도 않았던 선물을 받기도 한다. 봄날 안개비를 맞고 올랐던 마이산 전망대에서 화려한 눈꽃 세상을 만나기도 했고 심산유곡 시원한 약수로 목을 축이는 여유도 맛보았다.

산은 그렇다. 올라가면 반드시 내려와야 한다. 어렵게 오르면 내려오는 일 또한 만만치 않다. 같은 산이어도 갈 때마다 그 느낌은 다르다. 계절 따라 동행하는 사람에 따라 그날의 산행이 달라진다. 초행길은 설렘이 있고, 발길 익숙한 길은 편안함이 있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사소한 풍경도 보인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내려올 때 보았네.’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정말로 놓치고 가는 것이 많다. 사실 산 정상에 오르겠다는 일념 하나로 숨이 차고 힘들어서 볼 여유가 없다. 잠시 멈춰서 바라볼 걸, 대화라도 해볼걸, 힘들고 지쳐서 잠시 고개 돌리면 될 걸 어찌하여 늦게야 알게 되는지, 늘 아쉽다.

다소 늦더라도, 뒤처지더라도 주위를 살피고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늘 정상을 탐하지 않아도 된다. 그 과정이 중요한 것이니까. 순간순간 옆을 돌아보면 언제나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서 있지 않던가. 우리 사는 삶이 그렇다. 삶의 목표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기듯, 그 과정도 산행하듯, 올라갈 때 못 본 꽃처럼 하루에도 많은 것을 놓치고 사는 건 아닐까 돌아보리라 마음 다잡으며 배낭을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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