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년 새해 첫날이자 설 명절이 지나갔다. 매년 설날이 다가오면 기대와 불편한 마음이 인다. 기대라면 한 살 더 먹는 나이의 변화와 새해맞이의 각오이며, 불편한 마음이라면 차례상 준비의 부담이다.
설이나 추석 명절에 지내는 차례는 약식제사라는 의미 속에 기품있는 명칭을 담고 있으나, 기실 차를 올리는 형식이 거의 사라진 터에 정성을 다한 제사로 통용하게 되었다 싶다.
그러니 차례상 차림이라기보다 제사상 차림이라고 말하는 게 자연스럽다. 차를 올리는 인습이 사라지고 술을 올리는 방식으로 바뀐 시기가 영조 시대부터였다고 하니, 차례상을 제사상으로 말해도 무리가 아닌 듯싶다.
기제사든 명절 제사든 후손들의 정성을 다한 행사의 준비는 지금껏 꾸준히 이어졌다. 문제는 제사를 준비하는 마음이 부담스럽고 불편하다는 데 있다. 예부터 제사상 음식 장만은 여성들의 고유영역이라 할 만큼 할머니, 어머니, 며느리로 문화적 전통의 명맥을 유지했다.
그런 추세에 따라 우리 가족의 연례행사도 수십 년간 그렇게 시행되어왔다. 장남이기에 마땅히 수행한 관행적 효의 행렬임에도 단 한 번이라도 정신적 과부하 없이 지낸 적이 없다. 설이든 추석이든 날짜가 가까이 다가오면 몸과 마음이 긴장하고 뭔지 모를 우울증 같은 아픔이 시작되었다.
나보다도 아내가 더욱 심했는데 미리 엄살을 떠는 게 아니라 실제로 몸이 아팠고, 신경이 예민해져 사소한 말이나 일에도 언성이 높아지고 신경질이 심해졌다. 나는 평상시에 비해 조심스러웠고, 미안해 했으며, 가능한 어려운 일을 기꺼이 감당할 자세를 갖추었고, 아내의 모든 요청에 부응했다.
그 효(孝)에 걸맞은 맛있는 음식의 차림을 위한 성스런 복무의 시간이 어서 빨리 가기를 고대했던 게 수십 년이었다. 제사라는 의식이 왜 생겼으며 어찌하여 연례행사로 치러야 하는지 깊이 연구하거나 따지고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저 어렸을 때부터 보았고, 경험했고, 즐겼던 성장 과정에서 습득된 관습이 제사를 치르도록 그렇게 시켰다고 여겼다. 그러나 막상 제사를 치러보니 어려운 부분이 속속 드러났다. 스트레스와 불편한 과정에 따른 명절증후군에 젖게 된 것이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감내해야 할 의식임을 알고도, 도무지 편치 않은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제사상을 차린 후 조상의 혼이 흠향하는 절차와 시간을 두고 재배를 올리며 술잔을 따르는 절차는 어느 집이나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과정의 중심에 조상의 귀신(鬼神)이 흠향하리라는 정서적 공감을 갖는다.
귀신의 존재 여부를 떠나 조상을 생존시와 돌아가신 후에 효로 정성을 다해 공경히 모시는 행위는 무존재에서 유존재로 세상에 있게 해주었다는 고마움에 있다. 아울러 길러주시고 가르치고 삶의 역할을 하도록 도움을 주셨던 모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불러낸 조상과의 감응으로 제사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진설된 제사 음식이란 조상과 후손을 잇는 중요한 매개가 되는 것이고, 흠향에서 후손의 식사에 이르기까지 연결고리가 된다. 제사상 위에 오르기까지 다듬어진 맛깔스러운 음식 맛에 얼마만 한 수고와 정성과 고심의 손길이 어렸는지 간단히 짐작하기 어렵다.
거의 여성에게 주어진 가학적 멍에라 할 만큼 추위와 피곤과 정신적 부담을 거쳐 요리된 음식은 수십 수백 년의 문화적 전통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고달픈 노고의 결과물이다.
요즘에 수많은 가정의 개별적 사정에 노출된 내용을 보면 제사 상차림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반발이 커져 있음을 본다. 종갓집을 비롯하여 대가족이 겪는 부담의 아우성이 제사상의 폐지 혹은 간소화로 가자고 외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제사가 없는 개신교의 품으로 들기도 하고, 원불교 합동 제사나 동학의 정화수 한 그릇의 기도로 효의 질적 조화를 주장하기도 한다. 심지어 제사의식을 악습이라고 폄훼하며 제도 개선조차 가당치 않음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시대적 변화의 추세에 따른 여성들의 정의로운 주장과 논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으며 많은 남성의 호응이 있음에 비추어 간소화로 가야 함이 필연이라고 여긴다. 그래도 효의 긍정적 의미가 살아있는 한, 차례건 제사이건 기념이건 음식이나 정화수 앞에서 기도하고 조상을 추억하며 가족 간의 우의를 다지는 행사는 이어져야 할 것이다. /황정현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