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20여 명이 내변산을 종주하기로 한 날. 아침부터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던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채울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혼자 떠나도 좋은 판에 친구들과 함께라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내변산 탐방 지원센터 주차장에 내리자, 병풍처럼 둘러 있는 산이 우리를 맞는다. 산에는 봄 여름 내내 푸름으로 빛나던 잎들이 울긋불긋 곱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 위로 부서지는 햇살이 부시다.
직소 천 은빛 물살은 서두르지 않고 유연(幽然)히 흐르며 길손의 발길을 붙든다. 오늘 산행을 하는데 서두르지 말고 여유를 가지라 당부하는 것 같아 일행과 보폭을 맞추어 걸었다.
벼랑길을 따라 언덕을 넘으면 숲이 깊어져 청량한 바람이 가슴에 닿는다. 여울져 흐르는 물소리와 재잘대는 산새 소리가 하모니를 이루며 반긴다. 바위틈에 피어 있는 하얀 구절초와 노란 붓꽃들도 해맑게 피어 부는 바람에 깔깔거린다. 저절로 충만해 오는 자연의 기(氣)가 실팍하다.
변산은 숲과 꽃과 바위와 냇물이 예사롭지 않아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모진 세월을 겪어내고도 말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여인처럼 중후하고 정갈하다. 옛 선인들도 변산을 일러 산이 겹겹이 쌓여 골이 깊고 그윽하다 하였고, 깎아지른 듯 높고 가파른 바위가 가히 절경이라 하였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많은 봉우리와 골짜기는 우리나라의 십승지(十勝地)의 하나라고 했다.
조금 오르니 실상사(實相寺)가 우뚝하다. 청림사, 내소사, 선계사와 함께 변산 4대 사찰 중 한 곳이다. 689년(신라 신문 왕 9년)에 초의선사가 창건하여 조선왕조의 효령 대군이 중건했다 한다. 대웅전에 ‘월인천강지곡’ 등 국보급 문화재들을 소장하고 있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토벌 작전 때 전소되었다. 아까운 일이다. 근간에 옛터를 찾아 법당과 삼성각 등을 복원했다.
실상사를 벗어나 숲속 길로 들어섰다. 골짜기에는 벌써 단풍이 내려앉으며 선경을 연출하고 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달라지는 경치는 해탈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 같다. 마음이 붕-떠오르는 듯 희열을 느끼다가 경건해지기도 한다. 이 길로 한없이 나아가면 속세를 벗어난 무릉도원에 이르게 될까?
봉래구곡에서 더 나아가니 월명암으로 안내하는 이정표가 발길을 유혹한다. 월명암의 서산 낙조와 달 밝은 밤의 경치가 선경인데, 시간을 맞출 수 없어 포기하고 지나쳐 가는 마음이 애달프다. 그 대신 선녀탕과 분옥담, 직소폭포의 절경에서 아쉬움을 달래기로 하고 바쁜 걸음을 옮긴다.
선녀탕을 지나 만난 분옥담이 경이롭다. 산중호수인데 그 길이가 400여m에 이른다. 산상에 있어서 물이 맑고 푸르다. 속세의 때가 하나도 묻지 않아 태고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한 듯 깨끗해서 그냥 거기서 산다면 나도 청량해질 듯싶었다. 달밤이면 선녀가 날개옷을 벗고 맑은 물에 몸을 씻었을 법도 하고, 신선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았을 법도 하다.
쪽물을 풀어놓은 듯 푸르디푸른 물에 내 모습이 비친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비추어지는 것 같아 부끄럽다. 물에 비친 내 모습이 부끄럽지 않을 그 날을 다짐하면서도 걸음을 쉬 내딛기 어렵다.
머뭇거리는 마음을 달래어 직소폭포에 이르렀다. 오늘은 수량이 적어 예전에 보던 직소폭포의 위용이 아니다. 장엄하게 내리꽂는 물기둥도 볼 수 없고 소용돌이치는 물굽이도 볼 수 없다. 낙엽 몇 장이 소(沼)위에 한가롭게 떠서 산들바람에 미끄럼을 탄다. 아래로 내려가서 실상용추에서 손을 씻고 골바람에 땀을 식히니 직소폭포의 아쉬움이 슬며시 녹는다.
잠시 숨을 돌린 후 오르기를 재촉했다. 가파른 잿배기 길이다. 이곳을 넘으면 관음봉 정상이 지척이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헐떡이고 몸에는 땀이 줄줄 흘렀다. 옆 사람의 심장 소리가 쿵쿵 울리는 듯하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이 정도 시련이야 당연하다. 성난 파도를 헤치며 노 저어온 배가 부두에 편히 닻을 내릴 수 있고, 폭포수를 뛰어오른 물고기가 더 너른 바다로 돌아갈 힘을 갖는 법이다.
왼쪽을 바라보니 웅장한 관음봉이 손짓한다. 몸은 천근만근 물에 젖은 솜 뭉치이지만, 그냥 포기하기에는 아쉬운 관음봉 정상이 우릴 유혹한다. 결전을 눈앞에 둔 병사같이 마음을 다잡고 정상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초입부터 벼랑길에다 오르막 내리막이 심했다. 한 줌 남아 있는 에너지를 모두 꺼내어 관음봉에 베팅하리라. 아슬아슬한 오름길은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기어오르고 한길 낭떠러지 길도 요리조리 피해가며 나아갔다. 나뭇가지 위에서 엿보던 다람쥐가 깜짝 놀라 내 달린다.
30여 분의 고생 끝에 드디어 정상에 우뚝 섰다. 서쪽으로는 서해가 일망무제로 펼쳐져 있고 손에 잡힐 듯 보이는 곰소만의 풍경이 한가롭다. 뒤편으로 내변산의 푸른 숲과 꽃들이 보료처럼 깔려있다. 넓고 맑고 깊어 보이던 분옥담이 옹달샘처럼 앙증맞고 푸르다.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주며 안간힘을 다한 노고를 다독거린다. 이런 보상이 있기에 땀 흘려 산을 오르는 것 아닐까.
정상에 발을 굳건히 딛고 두 팔을 번쩍 들어 가슴을 활짝 편다. 세상을 발아래에 둔 그 시간 만큼은 내 키가 석 자쯤 커진 듯하다. 서녘 하늘에는 서서히 노을이 짙어가고 있다. 붉은 노을 속으로 두고 온 세상의 왁자한 소음들이 아련히 들리는 듯 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