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수 없는 여행
떠날 수 없는 여행
  • 전주일보
  • 승인 2018.07.05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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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김 고 운/수필가

가정의 달과 겹쳐 열흘간의 연휴를 얻었다. 출근을 시작한 이후에 매주말 이외에 단 3일도 쉬어본 일이 없던 내게 정말 소중한 휴식과 충전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오래전에 자전거로 장거리 여행을 꿈꿔왔던 나는 며칠 전부터 지도를 보아가며 출발날짜를 손꼽고 있었다. 내 자전거 여행은 바닷가 쪽으로 가겠다는 것과 떠나는 날짜만 생각되어 있을 뿐, 아무것도 예정하지 않은 즉흥 여행이었다. 나는 여행을 떠나면 언제나 예정이 없이 가다가 맘 내키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즉흥 여행을 좋아했다.

예정하고 길을 떠나면 그 계획을 따르느라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소화할 여유를 구하지 못해 여행의 의미와 보람이 반감한다. 여행은 간섭받지 않는 자유로운 것이어야 눈앞에 보이는 사물이나 정경이 내게 전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다. 내가 가는 길에는 앞서간 사람들의 흔적과 그들이 남겨놓은 언어가 여러 형태와 소리로 남아 기다리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사물에도 그것들이 가진 언어들이 숨어 있어서 간섭 없는 마음으로 보아야 전하는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다. 여행이란 바로 길이나 새로 만나는 사물에 남겨진 메시지를 전해 듣는 일인데, 그 자취를 느껴볼 수 없다면 여행은 헛짓이나 진배없다. 여행은 눈으로 보러 가는 게 아니라, 보이는 사물이 전하는 의미와 다른 이들의 자취를 알아보고 느껴보는, 가슴에 새로운 자극과 사유의 경계를 넓히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여행은 그러한 것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고 그 그리움을 찾아내 반가워하는 해후일 것이다.

아내를 보살피던 16년 동안 아내의 병을 진단받고 치료할 방법을 찾느라 전국을 누비고 다닌 외에 나 혼자서는 단 하루도 집을 떠나 잠을 잔 적이 없었다. 어디든 떠나기를 좋아하던 버릇도 아픈 사람을 두고는 발동하지 않았다. 마음에 다른 생각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기에 가끔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뿐, 떠나지 못했다. 어쩌다 자전거를 타고 나간 일은 있었지만, 모두 당일치기여서 출발하면서 돌아올 시간을 계산해야 했기 때문에 여행이라고 할 수 없는 운동 수준이었다.

재작년 가을에 아내를 보내고 나서 새봄에는 어딘가를 향해 떠나리라고 다짐을 했지만, 이듬해 봄에 아무 데도 가지 못했다. 긴 세월 아픈 그녀를 두고 어딘가로 떠날 수 없었던 그 습관적인 죄책감 같은 마음이 남아있어서 홀홀 털어버리고 떠나는 일이 내키지 않거나 두려웠는지 모른다.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벗어나고픈 욕망과 습관이 되어버린 붙박이 생활이 서로 버텼지만, 벗어나고픈 욕망은 아직도 크게 남아있는 아내의 흔적을 이길 수 없었다.

지금도 어딘가에 혼자 신음하고 있는 듯한 그녀를 두고 떠나는 느낌이 들어서 길을 떠날 수 없었다. 떠나면 새로운 세상과 만날 것이고 그 새로움에 마음을 빼앗겨, 지난 16년의 간절함과 그 이전에 쌓아둔 애틋한 세월이 지워져 희미해지는 일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음을 충전할 필요가 강하게 느껴지던 차에 10일의 연휴는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드디어 떠날 날이 다가와 여행에 필요한 자잘한 물건을 챙기려는데 전화가 울렸다. 노인들이 가곡발표회를 여는데 녹화를 해달라는 친구의 부탁이다. 두어 차례 도와달라는 요청에 손을 써주지 못해 미안했던 터라 며칠 늦게 갈 요량으로 승낙했다.

안간힘을 다하는 노인들의 열정에 감동하며 녹화를 끝내서 영상편집을 하려는데, 프로그램 사용기한이 지나 쓸 수 없었다. 새로 프로그램을 구해서 써보려니 잘 모르겠다. 서점에 가서 관련 서적을 한 권 사고 식당을 찾다가 우연히 한국전통문화관 앞을 지나는데, 색종이 한지로 만든 바람개비가 알록달록 돌아가는 게 금세 내 마음을 잡아끌었다.

수백 개의 바람개비가 사락거리는 가운데 현란한 무늬를 만들어 돌아가는 광경에 한참을 넋 놓고 서 있었다. 물결처럼 바람의 무늬를 드러내며 돌아가는 바람개비의 색채와 소리를 스마트폰에 정신없이 담았다. 익숙한 듯 낯선 광경을 보며 떠나지 않아도 이렇게 생경한 세계를 볼 수 있다는데 환호했다.

바람개비 돌아가는 모양과 소리는 나를 어린 시절의 기억 속으로 이끌어갔다. 색종이의 네 귀퉁이를 잘라서 그 끄트머리를 가운데에 모아 철사로 꿰어 만든 바람개비를 들고 달리면 사락거리며 돌아가던 그 소리, 그걸 입에 물고 달리며 나도 비행기처럼 날고 싶었던 그 아련한 기억이 돋아났다.

누나와 형을 졸라 만든 여러 개의 바람개비를 한꺼번에 들고 달리면 내가 금세 하늘로 떠오를 수 있을 것 같아, 입에 물고 양손에 들고 노송동 언덕길을 달려 내려가던 그 시절로 날 데려갔다. 달리다가 힘에 부쳐 넘어지면 무릎이 까져서 피가 흘러도 다시 일어나 달렸다. 몸은 날아갈 수 없었지만, 마음은 창공을 날아 내가 모르는 곳으로 얼마든지 날아갔다.

날아 떠나고 싶은 내 욕망은 그때부터 자라고 있었을 게다. 그러나 아내가 아파 먼저 간 지금, 떠나는 일은 그렇게 아련한 꿈으로만 남아 내 마음에서 울컥울컥 솟구치고 있을 뿐, 이번에도 미세먼지를 구실로 머뭇거리다가 열흘을 허비하고 말았다. 어쩌면 그 떠남은 이 홍진(紅塵)을 아주 벗어나는 그런 날을 기다리는 마음이 아닐지…….

김고운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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