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처음이자 마지막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
  • 전주일보
  • 승인 2018.06.28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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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황 정 현/ 수필가

죽음이 경험할 대상일 수 있는가. 죽음을 경험한 순간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기에 경험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이 전 생애를 살아가는 일은 순간순간이 모두 시간을 배경으로 본다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날그날의 식사와 사용하는 언어가 그렇고 신발 끈을 고쳐 매는 동작과 여행의 모습이 모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다. 그런 처음이자 마지막인 시간들이 모여 나이가 되고 연륜이 쌓이며 경험들이 축적된다. 문명과 문화의 유의미한 발전과 시대를 이끌어가는 인간의 지성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들의 불화와 맞춤을 거쳐 품격있는 구조와 체계를 갖추었다. 오늘날 우리 눈에 띄는 경이로운 과학적 결과물들은 늘 처음이면서 마지막 물질의 등장일 뿐이다.

인간의 생물학적 성장과 진보는 눈에 보이는 현상계까지 올라서는데 그 중요한 단계마다 처음의 강렬한 인상을 먹고 들어간 흔적들이 쌓인 것이다. 축적된 흔적들마다 인간의 간절한 욕망의 실현물들이 줄로 서있거나 나열되어 있다. 시간 속에 흘러들어간 검고 희고 닳거나 윤택이 나는 소리들이 위세를 떨치며 존재를 드러내는 교향악을 연주하고 있다. 사치스럽고 휘황한 물리적 축조물들이 어찌 자만의 영광을 드리우지 않는 바가 있겠는가. 저물어가는 태양아래 환상적 아름다움과 떨리는 관능적 몸부림과 어울려 삶의 온갖 희열을 맛보는 생명의 극치가 세상의 처음과 끝을 장식한다.

처음은 늘 설렘이며 두근거리는 희열이고 가장 깨끗한 희망이다. 누구나 처음을 좋아하며, 처음 만난 여자와 남자에 빛나는 눈빛을 준다. 첫 만남, 첫사랑, 첫눈, 첫 발견 등의 처음의 간절한 기대를 품은 말들로 살길의 기쁨을 발견하는 눈부심을 잊을 수 없다. 그럼에도 경험된 ‘첫’의 관형적 의미는 이윽고 쇠퇴로 들어서며 두 번 다시 같은 속성의 두근거림은 없으며 비숫할지라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군더더기 없이 흐르는 시간의 잔상으로 물들어가는 마지막의 이미지로 끝나는 섧음이 진정한 민낯으로 남는 게 일반적이다.

사람 인생의 전체 구조는 어떤 사태나 놀이에 뛰어들던 낯선 풍경의 처음과 만난다. 익숙함에 차츰 물들기까지 시간과의 거래가 잘 이루어지면, 성장과 변화의 단계에서 든든한 자기 확신으로 화려하게 주변을 아우르며 자만의 불꽃을 사른다. 단계마다 입학과 졸업의 행사를 치르며 시험과 적응을 거쳐 자신만의 성곽을 구축한다. 처음의 서툴고 조야한 실수투성이를 다듬어가는 과정은 누구나 비슷하게 전개된다. 고민과 좌절의 음습한 고통을 이겨내고 자신의 능력에 걸맞는 직장을 선택하거나 자영업에 뛰어들기도 할 것이다. 순간순간마다 다가서는 처음의 낯섦과 무지의 세계를 더듬거리며 내딛는 발걸음과 용기 있는 접근이 그 자신의 삶을 만들고 새로운 인생의 텃밭을 가꾸게 되는 과정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나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영문서적을 파는 출판사에 취업했다. 외판사원으로 책을 팔 때마다 수당을 받는 직종에 들어선 것이다. 하루종일 카탈로그와 참고서적의 팸플릿이 든 가방을 들고 회사나 학교 등지를 방문하여 소개하고 사전과 책을 사도록 권유하는 일을 했다. 처음 시작하는 외판의 고달픔이라니, 참으로 어렵고 피곤한 세월이었으며, 가는 곳마다 문전박대를 당하며 쫓겨나곤 했다. 6개월간 한 권의 책도 팔지 못한 무능을 체험했으며, 차갑고 이기적 사회현장의 진면목을 여실하게 보았다. 한심스럽고 실망스러우며 슬픈 절망 끝에 나는 부끄러운 귀향으로 첫 직장의 아련한 추억을 잊어야 했다.

지금 나는 그 당시에 이리저리 돌아다닌 길거리와 학교 혹은 사람들을 단 하나도 기억할 수가 없다. 그냥 처음의 어색함과 치졸함을 견디며 무언가 소기의 성과를 이루려는 강인한 집념보다 무정한 절벽 같은 냉대에 부딪쳐 쉽게 포기하고 돌아선 서글픔만 기억 날 뿐이다. 단 한 권의 책이라도 판매의 대열에서 수당을 받으며 희희낙락거리는 다른 외판원과 기쁨을 같이한 적도 없었다. 그 신산스런 6개월을 뒤로 한 채 가난한 풍경을 이고 있는 고향 집을 찾아가는 나의 신세가 처량할 것은 불문가지였다. 책 외판은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희극적 삶의 쓰린 추억으로 과거의 땅에 묻혔다. 다시 겪지 않았던 외판의 슬픈 기억 때문이었던지 교사로서 학교에 근무하게 되었을 때, 나에게 책을 권유하며 구입해달라고 요청하는 외판원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고, 세계문학전집이니 사상전집이니 하는 책들을 월부로 들여놓았다.

쑥스럽고 치기 어린 일들만이 처음이자 마지막은 아닐 것이다. 무수한 순간마다 보고 듣고 냄새 맡는 일들이나 대화들이 늘 처음이며 마지막인 상황 투성이다. 모든 사건과 사연들은 처음과 마지막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데 그 의미에 함축되어있는 과정과 결과로 운명이 달라지거나 변화하는 게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인류 문명과 문화의 모든 단락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들로 진행된 결과물이기에 그 시간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삶 전체가 기적이며 경이로운 경험의 축도이다. 죽은 자에게는 처음과 마지막의 기세 좋은 서슬이 아예 없음을 안다면, 살아있는 자의 처음이자 마지막 풍경은 정녕 모두 축복이다.

황정현/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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