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은 무척이나 추웠다. 내 어릴 적 문고리를 잡으면 손이 쩍쩍 달라붙던 그 때의 추위를 무색케 했다. 한반도 상공에는 영하 50도의 한랭 기단이 머무르고 있어 북극의 빙하지대보다 기온이 낮다고 했다. 몇 십 년 만에 처음 보는 추위라고 혀를 내둘렀다. 물도 얼고 땅도 얼고 내 마음까지도 꽁꽁 얼었다. 몸서리치는 추위에 겹겹이 얼어 봄도 더디 오려 나 했다.
그러나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토록 매서운 추위가 꽁꽁 얼어붙게 하고 새싹이 나오지 못하게 훼방해도 때를 어기지 않고 왔다. 개선장군처럼 나팔을 불며 늠름하게 찾아온 게 아니라, 소리 없이 조용히 다가왔다. 겨울처럼 폭풍이 몰아치는 것도 아니고 여름처럼 뇌성벽력이 요란을 떠는 것도 아니다. 아무도 모르게 살며시 와서 나무를 어루만지면 잎이 돋고 꽃눈에 손짓하면 꽃망울이 미소를 머금는다. 그 바람에 내 마음도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결코 봄은 쉬이 온 것이 아니다. 한 생명이 탄생하려면 오랜 시간동안 고통을 감내해야 하듯 봄도 혹독한 추위 속에서 인내하며 담금질하는 시련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때론 휘몰아치는 설한풍도 견디어야 하고, 매서운 동장군도 물리쳐야 한다. 살을 에는 혹한 속에서 생명의 불씨가 꺼지지 않게 껴안고 보듬어가며 기어이 새 생명들을 풀어내놓았다.
매섭게 몰아치는 눈보라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생명의 깃발을 올리며 보란 듯이 자라는 채소들도 있다. 그들은 텃밭 한쪽에 오붓하게 모여 자라는 녹황색 채소이다. 긴 겨울 동안 눈길 한번 안 주어도 흰 눈을 덮고 꿈의 나래를 펴고 자란다. 힘세고 날쌘 동물들은 추위를 피해 피난처나 보금자리를 찾지만 붙박이로 사는 그들에게 그건 사치에 불과하다. 가녀린 뿌리를 대지에 내리고 화사한 봄을 기대하며 긴 겨울을 버텨낸다. 추울수록 더욱 초록빛을 발하는 것을 보면 극한 상황을 이겨내는 불굴의 투사와 같다. 초봄이 되면 초록빛 얼굴로 식탁을 푸르게 물들이고, 향긋한 맛으로 식욕을 자극하는 그들은 이미 겨울부터 봄을 잉태하고 있었다.
채소나 나물도 차가운 날씨 속에서 그들의 생명과 꿈을 키우며 안간힘 할 때, 나는 긴 겨울 동안 미망의 시간들은 보내며 허송했다. 가을부터 시나브로 자라던 게으름이 겨울철이 다가올수록 아예 주인 인양 행세 하며 나의 마음 바탕을 차지했다. 분분히 날리는 흰 눈에 날려 보내려 했지만 따뜻한 양지 뜸을 향해 파고들었다. 봄이 왔는데도 떠나려는 기척이 없다.
온돌방에 안주하여 게으름이 게으름을 부르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간간히 적어오던 글쓰기도 접어두고, 수년에 걸쳐 써 오던 일기마저 밀쳐 둔지 오래다. 이 게으름이 바로 나의 잘못된 버릇이다. 그간 학창시절이나 사회생활 시절에도 이 버릇 때문에 후미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는데 다시 나를 짓누르고 있다. 얻은 것도 없고 쌓은 것도 없음은 이것이 나에게 물려준 선물(?)이다. 나태의 늪에 빠진 겨울이었다. 어떤 형벌이 나를 옭아맬지 걱정이 앞선다.
겨우내 서너 평 방안에서 칩거하던 나도 오늘은 부산을 떨며 봄을 찾아 나섰다. 아직은 차가운 바람이 간간이 코끝을 시험 하지만 바람결 사이마다 목화솜처럼 보드란 기운이 스쳐지나간다. 드센 겨울에는 느낄 수 없었던 감촉이다. 한가롭게 걸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묵직한 분위기 속에서 침잠의 늪에 빠져 있던 회색빛 빌딩들이 한 겹의 옷을 벗은 듯 홀가분하게 맨살을 드러내고 있다. 내 유년시절 무수한 추억들을 겹겹이 색칠했던 산자락에는 생기가 넘친다. 봄을 닮은 듯 산뜻한 옷으로 맵시를 낸 소녀들의 발걸음도 한결 가볍다. 꼬마들의 얼음놀이판이던 호수에는 강태공들이 긴 낚싯대가 잔물결에 춤을 춘다. 흑백의 무채색보다 일곱 빛 유채색이 빈 공간을 화가의 캔버스처럼 채워가고 있다. 멀리 나서지 않더라도 봄이 유리창에 비친 실루엣처럼 보였다.
봄이란 말을 곰곰 생각해 본다. 여러 가지 함의가 있다고 하나 그 중의 하나가 <본다>에서 왔다고 한다. 봄이 되면 겨울에는 감히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자연 환경과 약동하는 생명체들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계절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리라. 꽃이 활짝 피고 벌 나비가 나는 것을 몸소 보고 만날 수 있다는 데서 유래했을 것이다. 삼라만상의 변화를 본다는 것은 외형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진정 숨어 있는 진리를 깨우치라는 뜻도 있으려니 싶다. 생동하는 변화를 보고 그 속에서 희열을 느낌과 더불어 구태의 탈을 벗고 새싹처럼 새로 돋아나라는 뜻도 있을 게다.
봄은 일 년을 새로 시작하는 계절이다. 일년지계 재어춘(一年之計 在於春)이라 하던가. 새로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하고 하던 일이 여의치 않을 때는 궤도를 수정하는 때이기도 한다. 때론 자기의 몸가짐이 바른지. 타인에게 누가 되는 행동은 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할 때이기도 하다.
이제는 봄이다. 나를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한다. 빗나간 것들이 있으면 새로 고쳐야 한다.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번민의 조각들은 걷어내야 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에만 탄성을 지를 것이 아니라 어느 위치에서 어떻게 길을 걷고 있는 지 봄꽃에 탐닉하기보단 내 본디 모습을 돌아보아야 한다.
백금종 /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