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노란색을 흩뿌리며 우수수 떨어지는 은행잎에서 삶의 섭리를 본다. 가을은 은행잎이 제대로 물들어 날리고 구르기 시작해야 비로소 맛이 든다. 곱고 자그마한 노란 잎들이 찬바람에 우수수 떨어져 포도 위에 구르고 쓸려갈 때, 나는 생의 끝과 희망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어서이다.
앙증맞은 잎들의 속삭임은 내 가을에 아련한 그리움으로 적혀있다. 어릴 적 첫사랑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내 앞에 섰을 때, 나는 그 얼굴을 보지 못하고 마당에 구르는 노란 잎을 주워 만지작거렸다. 그 현기증 나던 순간, 작살처럼 가슴에 꽂히던 첫사랑의 전율이 온통 나를 감싸서 숨이 가빴고 눈을 들어 다시 바라볼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먼발치에서나 바라볼 수 있었던, 가까이 가면 터질 듯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킬 거 같았던 사랑. 맴돌기만 할 뿐, 앞에 나서서 뭐라 말 한 마디 못하던 어설픈 사랑이 가을이면 노란은행잎과 함께 돋아난다. 그 사랑은 끝내 나 혼자만의 것이 되어 가을이면 노란 잎과 함께 내 앞에 왔다가 어느 결에 떠나기를 반복한다. 내 가을은 그래서 아련하고, 조금 더 쓸쓸하고, 눈이 내릴 때까지 아스팔트 도로에서, 공원의 벤치에서, 전주 향교의 마당에서 불쑥불쑥 돋아나와 날 아프게 한다.
그 오랜 옛날의 그리움을 오늘까지 지니고 사는 까닭은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그때 그 간절함을 그대로 지니고 가슴속 비밀창고에 숨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늙바탕에 주책없어서 지워버리려 숱하게 애썼지만, 그건 내 오랜 가슴앓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그냥 지니고 있으면서 오늘도 이렇게 노란 단풍을 밟으며 아련한 아픔을 되뇌고 있다.
오늘처럼 노란 잎으로 치장한 카펫 위를 거닐 때면 첫사랑의 그리움과 함께 내 곁을 떠나간 부모와 딸과 아내와 형제들을 향한 그리움도 함께 스쳐간다. 그리고 바쁜 걸음으로 먼저 길을 떠난 친구들과 내게 정을 주었던 모든 영혼들의 그리움까지, 모든 그리움들이 고개를 들어 날 아프게 한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가을은 이처럼 그리움과 아픔을 뒤적거리며 보내는 계절이지 싶다.
그렇게 내 가을은 그리움과 외로움과 아픔이 가슴을 후벼 파는 계절이 되었다. 올 가을에 들어서면서 차라리 가을이 없었으면 싶다고 어설프게 몇 줄 시(詩)를 적었던 마음이 내년에는 더욱 쓰라린 아픔으로 솟아날 것이다. 아프지 않은 건 사랑이 아니라고 했다. 아직도 세상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살아 있다는 게 어디인가? 그래서인지 이 가을에 생살을 찢으며 돋아나는 사랑의 흔적조차 고맙고 과분하다.
은행잎은 벌레가 먹지 않는다. 파 먹히지 않아서 제대로 부채꼴을 갖추고 당당하다. 긴 잎자루는 미인의 가녀린 목에서 느끼는 기품과 절제된 미를 자랑하며 요염하기까지 하다. 앙증맞게 작고 노란 잎들이 날려내려 수북이 쌓이면 작은 입으로 사각사각 노래를 부른다. 은행잎의 노래는 갈잎들처럼 시끄럽지 않고 은근하다.
사람들은 노랗고 붉게 물든 가을 잎을 보며 그 현란한 색에 감동하고 아름답다는 찬사를 말한다. 잎이 물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응축하여 나무를 위해 일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오랜 수고 끝에 받는 보상이 라는 게 붉고 노랗게 물들어 쓸쓸히 나무에서 떨어져 내리는 아픔뿐이다. 떨어져 구르다가 다시 나무 밑에서 썩어 거름으로 나무를 위해 제 몸을 송두리째 공양하는 거룩함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눈에 보이는 울긋불긋한 색에 마음을 둘 뿐이다.
황금빛 가을, 빛나는 시간이 흐르고 있다. 조금은 쌀쌀한 듯, 그러나 춥지 않고 퍽 지낼만한 이 계절이 되면 나는 갖은 구실을 다 붙여 자꾸 걷는다. 걸으면서 가을이 주는 의미를 더듬다 보면 스치는 바람이 더욱 향기롭고 상큼하다. 구르는 낙엽의 노래에 쓸쓸함을 공감하며 눈물이 흐르면 흐르도록 두고 걷는다. 걷다보면 가을바람이 어느새 닦아 내서 흔적도 없다. 내 가을의 시간들은 해마다 노란 잎들이 다 떨어져 빈가지만 앙상할 즈음이면 하얀 눈으로 덮여 소멸하듯 자취를 감추었다.
그 소멸했던 가을 시간이 지금 다시 노란 은행잎의 안내를 받아 내 앞에 섰다. 시간은 내게 잊었던 상념의 주소를 적어 내밀며 황금 잎이 수북해진 길을 찾아 일어서라고 말한다. 그 넉넉한 공간에서 기억의 인자들을 불러내어 다시 그리움과 아픔의 시간을 되새김질해보라고 권한다. 그 되새김질을 통하여 나의 존재를 자각하고 내가 지금 서 있는 자리의 좌표를 알아볼 수 있어야 앞으로 내가 걸어갈 방향을 알 수 있고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것인지 가늠할 것이라고 일러준다.
노란 잎이 거리에서 자취를 감추면 추운 겨울이 된다. 추위와 함께 지독한 외로움이 날 떨게 한다. 오래지않아 나도 저들 노란 잎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작은 위로를 받는 건, 갈잎이 봄에 돋아날 새잎을 위하여 거름이 되듯 나도 미량이나마 피어나는 잎을 위해 몇 방울의 땀을 보탰을 거라는 짐작이다.
어서 일어서서 저 은행잎이 다 떠나기 전에 그리운 것들을 그리워하며, 바람에 이리저리 휘몰려가는 낙엽들의 주소지를 찾아 걸어야겠다.
김고운/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