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남기고 떠난 친구
가을을 남기고 떠난 친구
  • 전주일보
  • 승인 2017.11.02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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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김 여 화 /수필가

이른 아침 휴대전화기에 저장된 메시지 가운데 '부고 알림'이 들어있다. 낯선 전화번호에 그냥 무시해 버리려다가 다시 들어 확인을 했다. “김00 별세 하셨습니다. 성남 00장례식장”, 순간 올 것이 왔다는 생각과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가신 이에 대한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일단 당장에 다녀와야 하는데, 현재 진행중인 시화전 행사장을 어찌 할 건가. 거기다 먼 경기도 성남까지 왕복 몇 시간을 운전을 해야 할 거라는 생각이 미치자 앞이 캄캄 하고 머리가 지끈 거린다. 남편은 시내운전에 취약하고 특히 요즘 무릎이 아프다고 늘 무릎을 만지고 주무르고 사는데 어쩌나?

꼼짝없이 내가 운전을 할 수밖에 없다는 부담에 머리가 띵할 만큼 어지럽다. 한동네 사는 친구를 불러 문상을 함께 가기로 하고 주섬주섬 일단 행사장에 가져가야 할 것들을 챙기는데, 남편은 바쁜 아침에 느닷없고 주책 빠지게 머리 염색을 한다고 유난을 떤다.

남편이 같이 갈 동네친구를 태우고 내려오도록 하고 나는 사무실에 들러 먹을 물과 부의금을 챙겼다. 커피도 큰 잔으로 한잔 벌컥벌컥 들이켜고 떠날 준비를 한다. 내비게이션으로 성남시 장례식장을 검색하니 3시간이 걸린단다.

오늘 세상을 떠난 그는 그 옛날 봄에 내가 서울에서 관촌으로 시집왔을 때 결혼 선물이라며 화투 한목을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그해 여름부터 겨울까지 화투짝이 닳도록 날마다 ‘육백’이라는 점수내기 화투놀이로 무료함을 달랬다. 내가 그 이듬해 추석에 서울 친정을 가게 되었는데, 오늘 운명한 그 친구가 펜팔을 하던 여자 친구가 소식이 끊겼으니 서울에 가면 찾아봐 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친정이 경기도 남양주시 구리읍에 있을 때였는데, 나는 내 동생들을 데리고 그의 여자 친구를 찾아 돈암동인지 삼선동인지 서울 달동네를 헤맨 끝에 찾아냈다. 그녀는 당시에 동대문에 있던 고속터미널에서 우리부부를 배웅하러 나왔다가 그냥 우리를 따라 시골로 왔다.

전주서 시내버스를 타고 도로가에 내려서 북재를 넘어 상월리까지 와야 했던 그 시절, 그녀는 참깨를 보고 ‘무슨 나무냐?’고 물어볼 정도로 시골을 전혀 몰랐다. 아주 낯선 풍경과 농촌생활을 막연히 동경하는 그런 소녀였다. 참깨가 질겨서 도끼로 베어야 한다는 내 짓궂은 설명에 ‘정말이냐?’고 되물었던 순진했던 도시처녀였다.

그렇게 맺어진 그녀와의 인연은 얼마 후에 그녀가 견디지 못해 서울로 이사했다. 조촐하고 또는 거창한 이별의 노래를 부르며 서울로 떠났고 모두 건강하던 시기까지는 오고가며 우리부부와 그 친구 부부는 정다운 친구였다. 어려서부터 한 동네에 살았던 진실한 친구로 서울이 친정이던 나는 가끔씩 서울에 가면 만나서 동기간 보다 더한 정을 나누며 살아왔다.

어느 여름, 뻐꾸기가 구슬프게 울던 날 그녀는 달랑 아들 하나 남겨두고 도시생활에 지친 몸을 뉘었다. 그녀가 우리부부의 가슴에 정만 남기고 가버리더니, 이번에는 그 친구가 떠난 것이다. 후두암으로 오래 고생 하다가 오늘 새벽에 운명했다고 문자가 날아든 것이다.

지지리도 복도 없던 부부였다. 일찍 둔 아들 하나가 중학교 다닐 무렵에 일찍 가버린 그녀, 우리부부는 그녀가 떠난 날도 오늘처럼 급히 서울을 다녀와야 했다. 둘 다 직장에 다녀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서둘러 고인에게 인사만 남기고 돌아왔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오늘도 고인에게 인사만 하고 되짚어 왔다.

너무나 착해서 세상 살기가 버거웠던 그들 부부, 이젠 달랑 아들 하나 이 거친 세상에 던져놓고 떠나갔다. 그렇게도 즐거워하며 신혼의 단꿈을 꾸던 고향땅을 떠나면서 그의 삶의 모습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남편이 사우디아라비아로 돈 벌러 가서 내가 친정 근처에서 살던 1년 반 동안, 내가 몸이 아픈 둘째아이를 간호하며 지낼 때, 그 친구는 병원 응급실까지 혹은 집으로 방문하여 아픈 둘째와 나에게 큰 위안이 되던 때도 있었다.

서울 상계동에 살다가 지난여름에 성남으로 집을 옮겼다고 했다. 성남에는 그의 친누나가 살고 있었다. 12시쯤에 도착한 우리부부를 그 누나는 깜짝 놀라며 반겨주었다. 그동안 먹지도 못하고 호스를 연결해서 고통스럽게 연명 해 왔기에 가족들은 체념하고 차라리 잘 가셨다고 들 이야기 했다.

단 이틀정도만 고통으로 몸부림 쳤다고 했다. 차마 볼 수 없었다던 친구의 마지막 삶이었다. 이제 그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피안의 세계로 들어섰으니, 그의 순박한 영혼은 좋은 곳에 닿았을 거라고 믿는다.

애면글면 살던 그 친구의 지난날을 떠올리며 우리는 복도 지지리 없다고 한숨지으며 그들 부부와 추억들을 꺼내 이야기하며 내려왔다. 부디 편안하게 잘 가시길 빌어본다. 성실했던 그 친구의 젊은 날에는 그래도 행복했던 시간이 있었다는 생각을 해가며 마음 아픈 하루는 그렇게 지나갔다.

은행잎이 저리 노랗고 단풍이 고운 가을인데……. /김여화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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