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길에서 만난 천사
산책길에서 만난 천사
  • 전주일보
  • 승인 2017.09.28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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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금 종 / 수필가

아침 일찍 공원에 올랐다. 오르는 길에는 벌써 차가운 바람이 감돌아 몸을 움츠리게 했다. 불볕 같은 더위에 지친 몸을 달래느라 선풍기, 에어컨을 끼고 살던 때가 바로 엊그제였는데 벌써 낙엽이 가을바람에 날갯짓을 하며 나를 맞이한다. 지난여름 살인적인 더위에 수액을 강탈당하고 조로한 잎사귀들이 안식처를 찾아 몸부림치는 것일까? ‘빛깔은 고우나 모양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는 ‘구르몽’의 시구가 떠오른다.

 

공원의 숲길이나 운동기구가 세워진 광장에도 제법 나뭇잎들이 많이 쌓여 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음을 말해 준다. 가을의 심연 속에서 푸르렀던 지난날의 영화(榮華)를 곱씹고 있을까? 낙엽은 외로운 방랑자 모습으로 아무런 미련도 없이 침묵하고 있다. 한 점의 욕심도 없이 가진 것 모두 털어버리고 발아래 밟히고도 서러워하거나 노여워하지 않는다.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며 아름다운 강산을 위한 자양분이 되리라 체념하는 것 같았다.

 

정상에 이르자 담소를 나누며 운동을 하고 있는 노인들이 보였다. 벤치를 중심으로 모여 앉은 서너 명의 노인은 낙엽처럼 사위어가는 세월을 붙잡고 추억의 장을 들추고 있다.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이 고향친구처럼 다정하다. 공원의 주변에는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더위에 부대낀 몸을 단련하고 있는 이도 있었다. 심호흡을 하며 가뿐히 내딛는 발걸음이 젊은이 못지않다. 메말라가는 샘에 한 방울의 물기라도 더해보려는 노인의 노력이 숭고하다. 비록 나이 들어 성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정렬을 불태우는 모습만은 보기가 좋다. 또 몇몇 노인은 밤나무 숲에서 청설모와 경쟁하며 알밤을 줍는다. 새벽 공원은 어둠의 장막에서 깨어난 기지개를 켜며 새롭고 희망찬 아침을 열고 있었다.

 

공원 둘레 길을 따라 거니는데 오르내리는 계단마다 말끔히 청소가 되어 있다. 며칠 전 쏟아진 가을비에 흘러내려 후미진 구불 길을 가로 막았던 낙엽들까지도 걷어냈다. 쌓여있는 낙엽을 걷어낸 덕분에 산책하는 나의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누군가의 노력으로 공원은 화장을 지운 얼굴을 보듯 산뜻한 느낌이다. 남보다 앞서가는 용기와 순발력도 대단하지만 마음도 열려있는 분이리라. 먼저 실천하지 못한 내 자신이 부끄럽다. 누구의 수고인가? 궁금증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선다.

 

떨어진 낙엽도 자리한 위치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 있을 곳에 있어야 대접을 받는다. 그래야 운치도 있고 사람의 감정을 일으키는 법이다. 불편을 주는 곳이면 휴지 조각 같이 천덕꾸러기 대우를 받기도 한다. 심금을 울리는 가야금소리도 우아한 한복을 입은 여인이 연주할 때 더욱 짙은 감흥을 일으키는 것처럼.

 

한 바퀴 돌고 공원의 중앙부에 이르자 중년의 여인 한 분이 싸리비를 들고 광장의 낙엽을 쓸고 있었다. 드디어 공원을 오르면서 궁금해 했던 천사를 목격하게 되었다.

 

“수고하십니다.”

 

내가 건너는 인사말에 조금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환하게 웃었다. 접시꽃처럼 동그란 얼굴에 연분홍 꽃물이 들었다. 웃는 바람에 눈가에 주름살은 더 보였으나,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아름다운 마음이 얼굴에 꽃으로 피어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여인에게 ‘산책길에 만난 천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비질할 때마다 흙먼지가 일어 뒤집어쓰면서도 개의치 않고 낙엽을 쓸고 또 쓸어 모은다.

 

낙엽을 쓰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배려하는 마음이 아닐까? 나보다도 남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은 낮은 곳을 마다하지 않고, 상대를 높은 곳으로 인도하는 마음이리라. 배려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세상을 아름답게 꾸미는 원동력인데 이 여인이 그걸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거기에 더하여 낙엽을 쓰는 마음은 정갈한 마음이려니 싶다. 몸과 마음이 새벽의 샘물처럼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이 아니면 이런 자기희생을 생각이나 하겠는가? 낙엽을 쓸어 모으는 마음은 공원을 깨끗하게 가꾸려는 마음이고,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며, 더 나아가 인간을 존중하는 마음이리라.

 

쓸어낸다는 것은 비운다는 뜻이다. 너부러져 있는 낙엽이나 쓰레기들을 걷어내면 산뜻한 공원이 되듯이 마음에 가득 찬 헛된 욕심들을 버리면 한편 맑아지고 편안해지지 않겠는가? 묵은 것을 걷어낼 때 새것이 들어설 수가 있다. 인생 노을을 바라보고 있는 나도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탐욕의 찌꺼기를 훌훌 털고 다른 이를 생각하는 이타(利他)의 마음을 생각한다.

 

그런 마음으로 그녀가 쓸어내는 낙엽과 쓰레기에 내 마음속에 어지럽던 욕심과 헛된 생각들을 던져버렸다. 천사의 마음 앞에 속된 내 욕념들은 마땅히 버려야할 쓰레기였으니까. 그리고 자신을 던져서 세상을 깨끗하게 하는 아름다운 삶을 사는 그녀의 빗자루 끝에 던져진 내 치사한 욕념을 다시는 주워들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했다. 오늘 산책은 참 좋았다.

백금종/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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