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에서 무문관無門關을 뽑는데, 서른 몇 해 전, 생일이라며 아내가 써준 편지가 툭~ 떨어진다 정갈한 필체 젊은 설음을 풀어쓴 파란 잉크냄새를 맡다가 하마터면, 천길 벼랑에서 잡은 손 놓칠 뻔했다
지나간 세월은 왜 그다지도 불립문자투성이었던지, 왜 나는 외눈박이었던지, 왜 나는 불량 독서광이었던지?
하루를 쫓기는 산양이 되는 날이 오자 늙은 설표雪豹마저 피하지 않으면서 언제쯤 ― 이 절벽에서 손을 놓을까*
쓸쓸한 축의를 해독하며 없는 빗장을 연다
*無門關(중국 남송 무문 혜개 편찬 선종 公案모음)-(懸崖撒手(현애살수: 벼랑에 매달려 손을 놓다)
졸시「잡은 손」전문 |
지나간 세월을 반추하자면 후회스럽지 않은 일이 없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낸들, 그 기념사진 뒷면을 들여다보노라면 얼굴 붉혀지는 일이 꼭 숨바꼭질을 하는 듯하다. 그래서 일부러 과거를 불러내는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뿐이 아니다. 생각해 보면 지나간 일들을 들춰 쑤석거린다고 해서 지금의 내가 달라질 일도 없다. 굳이 법문에 의지하기보다 몸의 연치에 비례해서 자꾸만 생각의 깊이를 더하는 날을 맞고 보니 그렇다. 그래서 회상해서 상서롭지 못한 일, 추억해서 유쾌하지 못한 사건, 돌이켜서 회복할 수 없는 미련 등에는 과감하게 생각의 촉수가 뻗어나가는 것을 극구 경계한다.
나이가 가르친다고 했던가? 원하지 않아도, 굳이 기억하지 않으려 해도, 일부러 무시하려 해도 자꾸만 더해져 가는 것이 나이다. 몸의 나이테만 늘어가는 줄 알았는데, 감정의 피부에 민감성의 나이테도 함께 무뎌진다는 것을 실감한다. 생각뿐이 아니다. 영혼의 주름살도 함께 탄력을 잃어가는 것이 절실해질 무렵이 오고야 만다. 그래서 과거를 불러다가 내 몸의 나이테를 확인시켜주는 것, 감각의 나이테가 무뎌져 가는 것, 영혼의 주름살을 늘려가는 것을 사서 하지 않으려 애를 쓰는 편이다.
“당신은 나이만큼 늙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생각만큼 늙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을 때, 나를 두고 하는 말인 줄 알았다.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발심은 자연스럽게 과거를 단절해야 한다는 강박을 심어 준 셈이다. 후회스러운 일이 떠오를 때마다, 내가 늙어서 그런가, 자신을 탓하기도 한다. 실패했던 일이 생각날 때마다, 내가 노쇠해서 그런가, 자신 없어라 했다. 그런 중에서도 어머니에 관한 강박은 심한 편이다, 나에게는.
어머니만 생각하면 걷잡을 수 없는 오만 감정이 나를 휘어잡는다. 아무리 기억을 떨쳐내려 해도, 어떻게든 잊어버리려 해도, 도무지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의 지평은 넓어지기만 했다. 설날이나 한가위, 기제사나 가족 행사가 있거나, 아니면 내 생일날이면 어머니 생각에 사로잡히는 날이다. 열네 살 소년이 여읜 어머니가 그랬다. 다섯 살에 잃은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왜 나의 과거를 더 생생하게 하는 것일까?
“청춘은 퇴색되고 사랑은 시들며 우정의 나뭇잎은 떨어지기 쉽다. 그러나 어머니의 은근한 희망은 이 모든 것을 견디며 살아 나간다.”(올리버 홈즈. 시인) 아하, 그랬구나! 비로소 그런 생각의 뿌리가 드러나는 듯했다. 견디기 힘든 생존의 틈바구니에서도 안간힘을 낼 수 있었던 비밀이 바로 어머니였던 모양이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을 모아 희망의 정수리에 들이부을 수 있었던 용기의 출처도 어머니였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어머니를 대신할 존재가 내 인생의 버팀목이 되는 세월이 이어졌을 것이다.
며칠 전 책꽂이에서 책을 한 권 뽑았다. 그런데 책갈피에 들어 있었던지 웬 종이 한 장이 툭~ 발치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펼쳐보니 벌써 삼십 년도 훨씬 지난 세월의 저쪽, 아내가 생일을 축하한다는 덕담과 함께 용돈을 넣은 편지였다. 축하곡이라며 노래 가사도 적어 넣고, 선물이라며 용돈까지 동봉했던 모양이다. 좋아하는 CD음반이나, 유익한 책을 구입하는데 쓰라는 추신도 담긴 편지였다.
함께 늙어가면서 지난 세월을 회상하노라면 잘 해줬던 일보다는, 잘못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그래서 과거를 떠올리려 하지 않는데도, 이런 계기가 되면 어김없이 후회와 자탄의 심정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흔히 하는 말로 숟가락 하나마저도 제 손으로 마련해야 했던, 우리의 젊은 시절을 돌아보면 젊어 고생은 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사서도 안 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 그런대로 살아왔다. 그래서 이제는 과거의 후회가 지금을 희망으로 일으켜 세운 것은 아닌지, ‘어머니 생각’이라는 은근한 희망이 노년 풍경을 그려낸 것은 아닌지, 자문하곤 한다. 그래서 잘 살아왔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잘 돌아갈 수 있는 토대는 마련된 것이 아닌가, 자신을 토닥이곤 한다.
선종의 화두 공안집『무문관無門關』32칙에는 현애살수懸崖撒手 화두가 나온다. “매달려 있는 절벽에서 손을 떼라.” 삶의 벼랑에 매달려 있는 우리 형국이 마치 암벽을 오르내리며 눈표범의 습격을 피하는 산양처럼 애처롭기만 하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절망에서도 희망을 찾아 오늘까지 왔듯이, 손을 놓는 순간 또 다른 희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초월적 결단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시간의 결박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