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와 비유법”
“독서와 비유법”
  • 김규원
  • 승인 2024.11.11 13: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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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詩想隨想 - 85

 

 

 

호숫가 벤치에서 물결을 읽는데

기적 같은 것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깊은 수심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위를 걸어서 가는 이가 있다

 

그러고 보니,

심연에 가라앉은 돌멩이들과

수면에 떠서 흘러가는 나뭇잎들, 역시

수심이 읽어내는

무게나 깊이의 다름일 터

 

그저 좋은 길들은 물에 있음으로

자잘한 촉수를 비다듬으며,

오늘도, 한 걸음

또 한 걸음 걸어서 가노라면

그이처럼,

물위를 걸을 수 있을지

베 짜기로 촘촘해질 나의 일상이

 

졸시소금쟁이전문

 

간단하면서도 딱 맞아떨어지는 비유는 장광설[長廣舌: 쓸데없이 번잡하고 길게 늘어놓는 말]을 무색케 할 만큼 전달 효과가 크다.

석존께서 입적하시자 제자들이 크게 슬퍼했다. 삶과 죽음이 따로 있지 않고, []라고 할 만한 것이 어디에도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도 가르쳤건만,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입관한 채로 누워 계시던 석존께서는 늦게 나타난 가섭존자가 매우 슬퍼하자, 관 밖으로 슬그머니 두 발을 내미셨다.[槨示雙趺곽시쌍부: 가섭이 석가모니의 장례식에 늦게 도착하여 슬퍼하며 절을 하자 석가모니께서 관에서 두 발을 내어 보였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라[不二思想]는 진리를 전하기에 매우 적절한 비유다.

성경에 나오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18:25]라는 비유도 인구에 회자된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헬라어 원문은 낙타가 아니라 밧줄이었는데, 그 단어가 비슷해서 오역했다는 설, 바늘귀 역시 바늘의 귀는 맞지만, ‘바늘귀라는 문이 예루살렘에 실재했다는 설 등이다.

모든 짐을 벗어버리고 엎드려 웅크리며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만,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해석이야 어찌 되었든 비유가 가르치는 참뜻은 누구라도 쉽게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슬람교 성서인 코란에 이런 비유가 있다. “한 사람의 죽음은 온 인류의 죽음이다죽은 이는 하나지만, 그에게는 온 인류가 사라진 셈이다. 그러니 한 생명이 곧 온 인류의 무게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이다.

생명존엄성을 설파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비유를 찾기 어렵다. 죽이는 자와 죽은 자가 다르지만, 죽이려는 자가 이 비유를 들었다면 쉽게 흉기를 휘두를 수 없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온 인류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비유도 있다. 앞의 비유보다는 파급력이 떨어지지만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 표현이다.

불경이나 성경이나 코란은 온통 비유로 가득하다. 성현들께서 중생을 가르침에 있어 가장 좋은 교수법이 비유법임을 아셨던 모양이다. 하긴 종교는 초자연적인 절대자의 힘에 의존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다.

그렇지만 글자 뜻에 담긴 의미로 보자면 宗敎: 으뜸가는 가르침이다. 그러자니 불경이건 성서건 코란이건 비유법이 이야기의 전달과 성현의 표현을 담아내는 데 즐겨 사용됐던 모양이다.

독서에 관한 글을 읽다가 신통한 비유를 발견했다. 요즈음 한글세대의 문해력이 형편없이 낮다는 설명을 하면서, 그 이유가 모바일 폰, 동영상의 남발, 디지털 문명의 영향 등을 꼽으면서 이렇게 비유했다.

물에 돌멩이를 던지면 물이 출렁거린다. 반면에 바가지를 물에 던지면 둥둥 떠버리기만 한다. 여기서 물은 나의 인식認識이고, 돌멩이는 텍스트[text: 글 문자, 문장 등]이며, 바가지는 휴대폰이다.”(한겨레.‘24.11.9.) 출렁거림이 있어야, 즉 돌멩이처럼 인식의 수면에 파문[波紋: 물결무늬 즉 출렁거림]을 일으켜야, 파문[波文: 깊은 인식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휴대폰에서 보고 즐기는 동영상 등은 물에 뜨는 바가지처럼, 인식의 수면에 깊이 파동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래서 일회성으로 곧 휘발되고 만다는 것이다.

독서는 인식의 심연에 출렁거림을 낳는 돌멩이 작용을 해서 소통력, 독해력, 문해력, 창작력 등을 기르는데 유용하지만, 휴대폰 등 디지털 문명이 제공하는 영상만으로는 그런 능력들을 기를 수 없다는 것이다.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왜 디지털 만능의 시대에도 종이책을 읽어야 하는지, 그 필요성을 설득하기에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모처럼 한가한 시간에 호숫가를 찾았다. 햇살이 당양하게 비치는 한낮, 수면도 잔잔하기 이르데 없다. 이 고요와 평화가 온통 자기 것이라는 양, 소금쟁이가 물위를 자유롭게 거닐고 있다. 소금쟁이는 세 쌍 6개의 발을 지녔다.

그 발을 물위에 당당하게 딛고 아무렇지도 않게 물위를 산책한다. 그에게는 물의 깊이[水深]가 두렵지 않으니, 세상의 근심거리[愁心]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기적이란 다른 데 있지 않은 것 같다. 하지 않아도 좋을 근심을 하지 않는 것이 기적적인 삶을 일으킬지도 모를 일이다.

소금쟁이가 물위를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는 것은 여섯 개의 발에 수많은 잔털이 촘촘하게 돋아나 있어서 가능하다고 한다. 나도 그럴 것이다. 내 일상의 수면을 자유롭게 거닐자면, 물에 빠지지 않고 기적 같은 일상을 꾸리자면, 내 심연의 발에 수많은 사유의 잔털을 돋아나게 해야 가능할 것이다.

그러자면 감각하자마자 휘발하고 마는 쾌락을 담아내는 바가지가 아니라, 내 깊은 심연에 파문을 일으키는 돌멩이를 부지런히 던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책을 읽는 것은 소금쟁이가 물에 빠지지 않고, 물위를 걸을 수 있는 비결을 터득하는 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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