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던 아이가 묻는다.
출렁이는 슬픔이 바다냐고, 부끄러운 기쁨이 산이냐고
그렇다고, 내 몸을 몸이게 하는 바다라고 산이라고,
어떤 이는 우물을 파고, 어떤 이는 솟대를 세우지만
어깨 들먹이는 눈물이나 찬바람에 흔들리는 웃음처럼 혹은, 외롭게 사는 북극성처럼 혼자서 숨을 쉬는 길이라고, 시는—
졸시「문해」전문 |
문해는 문해文解를 말한다. 글자를 읽고, 글자로 이루어진 문장을 판독해서, 한 편의 글에 담긴 내용을 이해하는 일이다. 문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문맹자文盲者라고 한다. 까막눈이란 뜻이다. 세종대왕 덕분에 우리는 까막눈 신세를 면하였지만, 그게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불과 백년도 되기 전에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까막눈이었다. 글자가 있되 읽지 못하였고, 우리글이 있되 쓰지도 못하였다. 그러니 대부분 문자로 이루어지는 소위 문화생활이 불가능했다. 그런 불편을 견디며 살았다. 지금 같아서는 어떻게 살았을까, 의아하게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렇게 살았다.
그 뜻이 조금 바뀌었지만, 대서소代書所라는 곳이 있었고, 대서사代書士라는 직업이 있었다. 지금은 대서소가 전문 직종으로 분화되어 사법서사나 행정서사 등으로 문자 생활을 대신한다기보다는 전문 분야의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다. 회계사네, 공인중개사네 하는 직종들도 지금은 대서 대필보다는 전문 분야의 업무를 처리재 주는 곳이다. 그렇지만 예전의 대서소는 글자 그대로 문자 생활을 대신해 주던 곳이다. 아들딸이 출생하면 호적에 등재해야 하는데, 문자를 몰라 대서사에게 의뢰해서 일을 처리했다. 소위 문자를 통한 문화생활은 문해를 해야만 가능하다.
문해율文解率이란 말도 있다. 글을 이해하는 비율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조금은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포함된 용어다. 그래서 문해율을 단순히 문맹률文盲率의 상대개념으로만 볼 수 없다. 문맹률이 ‘한 나라 안에서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차지하는 비율’이라면, 상대적으로 문해율은 ‘한 나라 안에서 글을 읽거나 쓸 줄 아는 사람들이 차지하는 비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맹률도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에 여러 요소가 있지만, 문해율 역시 그 단계를 판단하자면, 여러 가지 요인들을 감안하기 때문이다.
요즈음 MZ세대라고 해서 2천 년 대 이후에 태어난 젊은이들이 구사하는 문장을 그보다 연세가 있는 분들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문해율이 낮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한글세대들이 한자 위주의 어휘들이 섞인 문장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문해율이 형편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를테면 ‘심심한 사과’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어린 학생들의 문해율이 형편없다고 나무랄 일은 아닐 것이다. “깊이 사과합니다”라고 하면 격이 떨어지는 표현이란 말인가? 더 나아가 “잘못을 깊이 뉘우칩니다”라고 하면 사과하는 마음이 진하게 전해질 것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일 때, 윤석열 후보는 대국민 사과를 한답시고, 집에서 기르는 개에게 과일 사과를 들이미는 사진을 SNS에 올리는 희한한 사과도 했다. 그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0.73%의 유권자들이 무엇에 씌었는지 사과답지 않은 사과를 받아들인 모양이다. 나라가 이렇게 혼란스럽게 된 것도 어찌 보면 문해율 낮은 사람들의 잘못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사정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10월 9일 제578돌 한글날을 맞아 전국 초․중․고 교사 5848명을 상대로 실시한 ‘학생 문해력 실태조사’에서 드러난 현상은,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결과는 어른들의 언어생활을 되돌아보게 한다. “‘사흘→4일’ ‘금일→금요일’ ‘이부자리→별자리’ ‘시발점→욕 하세요?’ ‘중식 제공→자장면 주세요’ ‘족보→족발 보쌈 세트’ ‘곰탕→곰요리’ ‘우천시 장소 변경→우천이 어디에 있는 도시?’”라고 응답했다고 한다.(‘24.10.15자.한겨레)
이런 현상을 웃고 지나칠 문제로만 볼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학생들에게 한자 교육에 더욱 나서야 한다고 엉뚱한 처방전을 들이밀 일도 아니다. 이런 형편은 세대차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디지털문명에 익숙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도 아니다. 문자-언어생활의 근본 목적이 바로 ‘소통’에 있다는 원칙과 원리를 무시한 데서 오는 필연적 현상일 수밖에 없다.
입말[口語]도 그렇지만, 글말[文語]도 마찬가지다. 내가 하는 말이 상대에게 알아듣기 쉬워야 한다. 내가 쓰는 글이 읽는 이에게 이해하기 쉽게 표현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려운 한자어나, 낯선 외국어를 섞어 쓰면 유식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폐습이 남아 있다. 한글을 창제하고도 5백 년 동안이나 온 백성을 까막눈으로 만들어 놓고, 특권을 가진 일부 사람들만이 문자생활을 해왔던 못된 관습이 아직도 뿌리 깊게 남아 있는 모양새다.
시는 소통을 위한 글이다. 다만 시는 밖을 읽어 안을 되비치는 글쓰기다. 시의 소통은 일반 언어생활의 그것과는 결을 달리한다. 뜻[의미]만을 전하자는 게 아니라, 그 시인의 안[느낌]을 그려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하는데, 대부분 이해 못한다는 것이 ‘뜻’이기 십상이다. ‘느낌’을 소통하고자 한다면 시처럼 쉬운 글 읽기가 따로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