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은 밖에서만 오지 않는다”
“재난은 밖에서만 오지 않는다”
  • 김규원
  • 승인 2024.09.02 12: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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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詩想隨想 - 77

 

모처럼 나를 진동케 하는 시 한 편 건졌다

 

이 생뚱맞은 지진의 강도를 긴급문자로 전해 주려니

수신처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어린 일꾼들은 모래밭에 디지털문자를 심느라

콩이건 팥이건 심을 호미조차 필통에 없고,

애국시민들은 보건체조 채널을 고정시킨 채

백세운동으로 밤낮없이 매진하는 중이다

 

하는 수없이, 천당으로 주소를 옮긴

말귀 밝던 벌거숭이 친구에게

벼락천둥으로 응답하라, 내 시를 타전했다

 

졸시재난문자전문

요즈음 대국민 서비스 정신이 높아졌는지, 관계 기관에서 보내는 재난문자가 수시로 전화기를 진동시킨다. 태풍이 접근하고 있으니 안전 관리에 각별히 힘쓰라는 둥, 폭염이 자심하니 외출을 삼가고 한낮의 활동을 자제하라는 둥, 코로나가 재유행하고 있으니 외출할 때 마스크를 쓰고 손 씻기를 생활화하라는 둥, 부안 남쪽 4km 지역이 진원지인 진도 3.1의 지진이 발생했다는 둥, 어떻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재난문자만 잘 살펴도 알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좋은 일이다. 사람은 안팎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은 주체적 자아가 관장하지만, 밖은 객관세계로서 자아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를 잘 건사하려면 안과 밖의 상황과 조건이 잘 협력하도록 조절하고 조응해야 한다. 내 의도나 생각대로 세상이 굴러가지 않으며, 세상의 변화상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나를 맞춰가서도 곤란하다. 앞의 의도에 충실하면 세상 물정 모르는 꼰대로 전락하기 십상이며, 뒤의 움직임에 맹종하면 자주의식을 상실한 허수아비가 되기 쉽다.

 

이런 위험성을 미리 간파하여, 자아와 세계를 제대로 조율할 예술이 필요하다. 예술-창작은 언제나 나를 던져서 세상의 진실에 맞춰 보려하기도 하고, 혹은 세상의 됨됨이에 어깃장을 놓아 나의 심기를 드러내기도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후안무치한 정치인들처럼 나를 전적으로 세상의 맹주로 삼으려 하지도 않으며, 예술가들은 능숙한 혀를 지닌 장자방張子房처럼 세상의 파도에 전적으로 몸을 싣지도 않는다. 언제나 나와 세상이 가장 이상적인 상태로 공존하기를 바라지만, 늘 그렇게 되지는 않는 게 사람이고, 세상이다.

 

그런 예술-예술가 중에 시-시인이 있다. 예술 중에서도 가장 첨예한 정신과 미감으로 사람과 세상의 바람직한 길을 앞장서 제시하는 역할을 자임하는 장르가 바로 시문학이요, 시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예술은 시정신을 지향한다. 시정신은 바로 예술정신의 모태요 귀결점이며, 안이요 밖이기 때문이다.

 

시문학은 객관 세계를 안으로 끌어들여 주체화함으로써, 사람 사는 세상,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꿈꾼다. 그래서 시문학은 언제나 순수하며[순수하다고 여기며-思無邪], 또한 언제나 새로우며[새롭다고 여기며-새로움의 새로움], 언제나 진실하다[참하다고 여기며-진리]를 담았다고 여긴다. 이 점은 시인이나 시를 대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인식이라는 점에 공감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시문학은!

 

참한 시인되기는 글렀을지라도, 참한 시인으로 살아가고자 다짐한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어쩌다 괜찮은 시 한 편을 썼다고 여길 때가 있다. 물론 대부분 제 그림 제가 칭찬하기 일쑤이지만 그럴 때가 있다. 이 맛으로 시를-시인되기를 바라며 살지 않는가.

 

이럴 때 스스로 찾은 감동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대상이 마땅치 않다. 내 됨됨이에 진도 7.0 이상의 파장을 일으키는 시를 건졌는데, 함께 그 떨림을 나눌 대상이 드물다, 아니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첫째, 뭐니 뭐니 해도 저 혼자 좋아서 우쭐대는 것을 누구더러 공감해 달라는 것이냐고 자책해야 마땅하다. 자기 시를 자기만 감동하고 느꺼워하는 것은 아닌지? 백보 양보해서 설사 그럴지라도 그런 감동을 함께 나눌 대상이 있다는 것은 썩 괜찮은 삶이다. 살면서 어찌 시뿐이겠는가? 하다못해 동네아침축구에서 어쩌다가 한 골 넣었다며 방방 뛰는 조카 녀석의 환호성에 박수를 쳐주는 심정이나, 하다못해 5만 원짜리 로또 복권에 당첨되었다며 좋아라하는 이웃에게 축하덕담을 건네주는 마음은 또 어떤가? 그런데 시에는 왜 그런 박수가 인색하기만 한 것일까.

 

둘째, 요즈음은 물성의 시대요, 디지털적 직거래 세상이다. 뭐든지 자기에게 직접적으로 자극을 주는 물리적 득템[좋은 물건을 얻음. 온라인 게임에서 아이템을 얻다의 의미로 쓰이다가, 생활 속에서 좋은 물건을 줍거나 얻었을 때 사용됨]이 아니면 도무지 관심조차 없는 세태다. 그런 형편에서 감정의 파장을 공유하며 동시에 정신의 노작이 필요한, 사유의 과정을 거쳐야 닿는 시에 쉽게 접근하려 않는다. 설령 세태가 그렇게 흘러간다 할지라도 그것을 마냥 좋다며 방관만 할 일인가? “생각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게 사람됨의 진실이다. 더구나 사유의 옷을 입고 감성의 걸음을 지닌 시의 세계는 더 말해 무엇 하랴?

 

재난은 밖에서 오는 물리 현상만은 아니다. 인류가 당대만을 위하며 살아간 결과 초래된 현상이 다름 아닌 쓰레기 대란이요, 기후 위기다. 영속할 수 없는 삶의 한계를 애써 망각한다고 영원히 살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때일수록 밖의 재난뿐만 아니다. 시대의 문맥을 바로 읽지 못해서 문해율낙제점을 받아야 하는 내 안의 재난 대처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내 졸시 한 편 받고 공감해 줄 선지식이 선뜻 떠오르지 않는데도 한사코 시를 놓지 못하고 있으니, 이 또한 나의 재난임에 틀림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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