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게 차라리 낫다’는 생각의 뿌리”
“‘없는 게 차라리 낫다’는 생각의 뿌리”
  • 김규원
  • 승인 2024.08.26 14: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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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詩想隨想 - 76

 

 

 

대빵없이도 잘 살았다고

회고록을 쓰려니 어금니가 어둡긴 하다,

잇몸으로 저작해온 세월이 얼마든가

한 오백년의 십분지일도 아닌,

까짓, 백분지일 정도야 없는 셈치고 견딜만하다

다만, 우리집 대빵을 날려버렸던

그래서 삼남삼녀, 그들 천연색 꿈마저

흑백사진으로 퇴색케 했던

그 불장난을

조자룡이 헌 창 쓰듯 하려는 집나간 대빵만은

있어도 없애기로 했다, 다시는

없는 내편이 있는 저편보다

못하지 않으니 잘라내야 했다

 

졸시무두절無頭節전문

어느 직종이든 책임자 밑에서 직장생활을 해 본 사람은 안다. 그 책임자가 일거수일투족 감시하거나 상관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수하자는 항상 경계하며 상관의 동태를 의식해야 한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다. 상관과 부하, 일을 주관하는 자와 그 부하라는 수직관계가 만들어내는, 어쩔 수 없는 조직사회의 특성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모처럼 그 상관[책임자건, 사장이건, 두목이건, 대빵이건]이 없는 날은 압박과 설음에서 해방된 날처럼 마음마저 가볍다. 그렇다고 해서 그 수하들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막말로 태업(怠業: 노동자가 일터에서 일을 하면서 일부러 작업 능률을 저하시켜 사용자에게 손해를 주는 행위)으로 능률을 떨어뜨리고, 생산율이 뚜렷하게 낮아지는 것도 아니다. 할 일을 하면서, 만들어내야 할 작업량을 채우면서도 그 부하들의 마음은 가볍기만 하다.

 

그래서 이런 날을 무두절無頭節이라고 하여 여느 직장에서든 직원들 사이에서는 널리 통용되는 신조어가 된지 오래다. 직장풍토의 한 단면이라고 보아 넘기기에는 사람됨의 실상을 여실히 드러내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직장인들의 심리에서 두 가지 정도 생각의 끈을 따라가 본다.

 

하나는 그래도 책임자가 자리에 없는 것보다는, 자리를 지키고 있는 편이 낫다고 보려는 관점이다. 그럴 것이다. 어느 일이건 작업의 속성을 제대로 알고 이를 지휘하여 최선의 목표를 최단시간 내에 달성하려는, 의지와 능력이 있는 책임자라는 전제 하에 수긍할 수 있다. 이런 책임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은 매우 환영할 만하다.

 

여기에 더하여, 그 책임자(두목)가 그야말로 자신의 직분에만 충실하여 직원들에게 업무 이외의 일에 대하여 간섭하지 않는다면, 이런 책임자는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훨씬 능률적일 것이다. 작업량을 과부하하지 않게 배분할 줄 알며, 직원들의 적성을 훤히 파악해 적재적소에 인원과 업무를 배분할 줄 아는 상관이라면 있는 편이 낫다.

 

둘은 차라리 책임자가 자리에 있는 것보다는, 자리에 없는 것이 낫다고 보려는 관점이다. 현실적으로 보아 이런 직장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부정할 수 없는 견해이기도 하다. 상관이라는 자가 직원들의 업무 이외의 일로 작업에 오히려 지장을 준다거나, 또는 직원들의 업무 배당에 편파성이 개입된다거나, 직원들을 적재적소에 배당하기는커녕 즉흥적으로 사람을 부리려 한다면, 그런 상관은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고 볼 수 있다.

 

보도에 따르면 커피심부름도 직장인의 스트레스요,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보는 게 시대의 추세다. 그렇지 않겠는가? 성별을 떠나서 직원마다 고유한 업무가 있을 터인데, “여성이니까 업무 이외에 커피심부름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이런 상관은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상관은 자신이 해야 할 업무가 무엇인지 헛갈리며 헤매는 두목이다. 이를테면 가장이라면 피땀을 흘려서라도 가족의 안위를 지키고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건사할 줄 알아야 가족의 대빵일 수 있다. 그런데 아버지라는 자가 허구한 날 술타령에 빠져 있거나, 되지도 않을 뜬구름만 잡는 식으로 노름에 빠지는 등 허황된 망령에 젖어 있는 두목이라면 없는 편이 낫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경우 그 책임자는 대체로 무지하거나 무도한 경우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 속언으로 치부하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금언이 속된 말이 아니라, 사회-심리학으로도, 타당성이 있다는 게 정설이다. 이에 관한 저서도 여러 권 출판되어 있으며, 실증적인 사례도 부지기수다. 그럴 것이다. “알아야 면장[免墻: 禮樂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담벼락을 마주한 것과 같다]한다, 아들 백어伯魚를 가르쳤던 공자의 언급이 괜한 어버이의 잔소리가 아니다. 담장을 마주한 것처럼 무도하고 무지하게 보이는 사례들이 지금-여기에도 차고 넘친다.

 

이를테면, 독립기념관장을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국적은 일본이라고 강변하는 자를 앉혔다. 그 독립기념관에 안치되어 계신 영령들이 통곡할 일이다. 무도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노동은 인간에게 부여된 삶의 근원이다. 그래서 사회가 발전하려면 노동자와 사용자의 슬기로운 협력이 필요하다. 그런 일을 하라는 노동부 장관에 노조원은 반국가 세력이라고 보는 반노동 인사를 임명했다. 무지한 행태가 아닐 수 없다. 방송을 장악한다고 독재가 가능할 수 없음은 현대사가 입증한다. 방송을 장악하려는 음모를 위해 헌신했던 인사를 방송통신심의위원장에 임명했다. 무책임한 망령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자가 가장이라면 한 가족의 불행으로 끝날 일이다. 아비는 6.25전쟁으로 어린 6남매를 두고 불귀의 객이 되었다. 아비 없는 여린 생명들은 의지가지 힘겹게 목숨을 지탱해 왔다. 그래도 반세기를 넘도록 또 다른 여린 생명을 거느리며, 다시는 가정의 울타리를 허물지 않겠다는 의지로 잘 살아남았다.

 

가장[대빵]이 없으니 모진 생명 의지가 발휘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다. 허울뿐인 가장을 두고 온 가족이 생 고생을 하느니, 못된 가장은 차라리 없는 게 낫다, 무두절을 그리워하는 속내를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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