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판사판에서 찾는 무아無我의 진리”
“이판사판에서 찾는 무아無我의 진리”
  • 김규원
  • 승인 2024.06.17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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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詩想隨想 - 67

 

셀럽은 연예나 스포츠 분야 따위에서 인지도가 높은 유명 인사를 일컫는다. 이 말은 영어 celebrity[연예인, 유명인, 명성, 배우]에서 유래하였는데, 우리말의 규정표기법으로 확정되기도 전에 널리 쓰인다. 언어의 쓰임이라는 게 원래 그렇기도 하지만, 조금만 관심을 끄는 말이라면, 외국어, 특히 영어를 쓰지 못해 사족을 못 쓰는, 언어 사해동포주의자들에게는 입맛에 척척 감기는 말이 되었다.

 

셀럽이 원래 연예나 스포츠 분야 따위에서라고 뜻풀이가 되어 있는데서 짐작하는 바와 같이, 격조나 품격보다는 대중적 인기에 편승하여 호명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위라는 말은 불완전명사로서 사람이나 사물 등을 비하하거나 얕잡아 나타내는 말이라고 풀이되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셀럽이라면 사람됨보다는 그의 성과 성적 업적 연기가 세상 사람들의 환심과 관심을 끌만큼 유명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런 셀럽을 무슨 훌륭한 인격의 명함인 양, 아니면 대중에게 무슨 선한 영향력을 행사라도 하는 지사인 양 대접하고 대접받으려는 행태는 원래 말뜻과는 말의 길을 달리하는 셈이다. 실제로 셀럽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유명인이라는 게 양가적兩價的 영향이 있다고 한다. 좋은 의미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봐 준다는 점에서 오는 편리함과 성취감이 있다고 한다. 유명인을 따르는 무리를 일컫는 팬덤fandom을 생각하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셀럽을 위해 시간과 물질과 일상사를 제쳐두고 그들을 따르는 열정이 상상을 초월한다고 한다.

 

나쁜 의미에서는 행동이 제약을 받는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름과 얼굴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사생활이 부자유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보통 시민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일상사가 그들에게는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일이라면 그런 삶도 매우 불편할 것이다. 그것도 한두 번이라면 모를까, 삶이 매우 불편할 것이 뻔하다. 그래서 이들은 오히려 무명인으로, 보통사람들이 누리는 일상의 행복을 그리워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럴 만하겠다.

 

그런데 유명인에 비해서 무명인이라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보통사람으로 여기지만, 불교의 12연기법에 의하면 무명에는 매우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알고 쓰건, 모르고 쓰건 우리말에 녹아든 무명이란 말은 바로 이 12연기법에서 유래되었다. 이처럼 우리말의 어원을 찾아 들어가다 보면 의외로 불교 용어에서 유래된 일상어가 매우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무명도 그 중의 하나다. 그렇지 않겠는가? 근대화 무렵을 전후해서 유입된 서양의 기독교 사상 이전에는 온통 유불선 삼교가 우리의 정신과 삶을 지배해 온 역사로 보면 당연하다.

 

우리가 흔히 쓰는 관용어구로 이런 말이 있다. “무지의 소치라는 말이다. 무지無知는 아는 것이나 지식이 없거나 미련하고 어리석음을 뜻하고, 소치所致는 어떤 까닭으로 생긴 일을 뜻한다. 그렇다면 아는 것이나 지식이 없거나 미련하고 어리석어 생긴 일이 바로 무지의 소치다. 이 말은 무명의 소치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무명이란 무엇인가? 석가세존은 무아無我의 진리를 역설한다. 삼라만상 그 어느 것도 영원불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다. 모든 것이 인과의 법칙에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질 뿐이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음으로 이것도 없다. 심지어 그것을 의식하는 나[自我]마저도 고정 불변하지 않다. 그런데 인간이 아는 것이나 지식이 없거나 미련하고 어리석어무지의 어둠[無明]’에 휩싸여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무지의 소치가 발생하고, 무명의 소치가 자아를 어둠에 휩싸이게 한다.

 

이런 진리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 편에는 이판理判의 경지에서 사람됨의 진실을 찾아가는 시인들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사판事判의 경지에서 나라살림을 꾸려가는 정치인[관리]들이 있다. 이판사판은 불교 세계에서 쓰이는 말이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말 역시 일상어로 자주 쓰인다.

 

불가에서는 이판이라면 참선하고 경전 공부에 용맹정진하는 등 불교의 교리를 연구하는 스님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현실의 논리보다는 진리와 진실의 길에서 사람됨의 근본을 구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현실에서 이판에 든 사람을 찾으라면 그래도 시인 말고 뚜렷이 떠오르는 사람이 드물다. 사판 역시 그렇다. 절의 산림[山林 혹은 産林]을 맡아 하는 일이다. 절의 재산 관리도 하고 절의 안팎살림을 꾸리는 일이다. ‘살림살이살림을 잘한다는 말도 바로 이 사찰 용어인 산림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현실에서 사판에 속한 사람을 찾으라면 역시 관리나 정치인이 제격일 것이다.

 

그런데 시인이나 정치인[관리]들이 왕조시대 임금 앞에서처럼 무지의 소치로소이다나 외쳐댄다면 어디에서 무아의 진리를 찾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유명한 셀럽 따위 되려하기보다는 독자와 민심의 바다인 이판사판에서 자기살림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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