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나[我]다움이다!”
“아름다움은 나[我]다움이다!”
  • 전주일보
  • 승인 2024.05.27 12: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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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詩想隨想 -64

 

길가 화분에 꽃을 심었다

 

혼정신성昏定晨省,

자리끼를 놔 드렸다

 

행인들이 한 송이씩 꽃을 피웠다

아름답다 예쁘다 곱다

 

그런 어원 가꾼 적 없다

다만,

시들어가는 노을에 응답했을 뿐

 

가뭄 뒤 개화만을 위해

비는 몸을 버릴까, 아닐지라도

나다움에 목이 마를 때마다

 

깊은 심연에서 꽃을 가꿨다

 

졸시나를 가꾸다전문

꽃 한 송이는 처한 환경에 따라 엄청난 의미로 피어난다. 언제[시간] 어디[공간] 무슨 일[환경]에 놓이느냐에 따라 꽃은 꽃 이상의 의미로 부풀려지기도 하지만, 꽃 이하로 취급받아 처참하게 낙화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를테면 결혼식장에 놓인 꽃은 인생의 가장 화려하고 즐거운 시절의 상징이다. 혼주의 가슴에 달린 꽃은, 성가한 자식들을 놓아 보내는 부모의 심경이 담겨 있을 것이며, 신부의 손에 쥐어진 부케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더욱 빛나게 하기에 손색이 없다. 더구나 그 부케가 끝내 결혼하지 않은 절친의 손으로 전달되는 과정까지를 생각한다면, 부케는 그냥 꽃이 아니라, 행복의 메신저가 될 만하다.

장례식장에서 꽃은 어떤가? 가신 이의 전생을 꽃밭으로 만들어 떠나는 길에 보내는 마지막 환송의 장식일 수도 있다. 물론 유가족들에게 그 무엇으로도 달랠 수 없는 별리의 아픔을 진정시키는 역할도 할 것이다. 이때의 꽃은 슬픔의 강물을 잔잔히 흐르게 하는 동질의 매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보다 먼저 세상을 버린 시우의 묘소를 찾은 적이 있다. 월남전 참전용사여서 국립호국원에 안장되었다. 소담스럽게 핀 국화꽃을 손에 들고 호국원의 정문을 통과하려다 제지를 당했다. 생화는 안 된다는 것, 조화라야 한다는 것, 그런 묘소에 들러본 적이 별로 없던 터라,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그런 조치를 이해할 수 있었다. 숱한 묘소마다 생화를 꽂아 두었을 때 발생하는 비위생적인 문제, 그리고 끝내 쓰레기로 버려질 꽃의 운명이 볼썽사나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궁여지책이 결국 조화만 허용한다는 것이리라.

꽃이 자신의 됨됨이와는 상관없이 많은 사람의 빈축을 사거나 망신을 당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가 누구누구를 지지한다며 청사 앞에 줄지어 서 있는 큰 화분들을 보노라면, 민망한 생각을 금할 수 없다. 꽃이 무슨 죄라고 생뚱맞게 지지와 호의를 저렇게 낭비적으로 과시한단 말인가?

꽃이 꽃인 이유는 모든 사물 중에서 가장 정채[精彩-아름답고 빛나는 색채로 모든 사물 중에서 가장 활발하고 생기가 넘치는 상태]해서 꽃이다. 그런 꽃이 평가와 의견이 백중세인 사람과 기관과 정책에 쓰이는 것은 꽃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하는 일에는 찬반이 갈리기 마련이며, 호불호로 나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럴 때 꽃의 쓰임은 자기세력의 과시와 상대를 압박하려는 매우 세속적 행위일 뿐이다.

꽃을 이렇게 이전투구의 도구로 삼는다면 과연 무엇으로 합목적성을 표방하는 사물로 삼을 수 있을까, 난감한 생각이 든다. 완전무결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마는, 그래도 인류는 꽃을 그런 대상으로 보아왔다. 꽃은 꽃의 목적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 어떤 외적 수단이나 방법을 취하지 않는다, 그것도 가장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그래서 인류는 꽃에서 그런 성정을 발견하고, 이를 인간이 결여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보완으로 여기며 아껴왔다. 그런데 근래 세태가 그런 성정마저 악용하는 듯하여 무색하다.

도시의 한구석에 자리한 집 앞에 화분을 두고 꽃을 심었다. 한두 개 내놓은 화분이 여남은 개로 늘어났다. 꽃은 네댓 종에서 스무 남은 종류로 불어났다. 연로하신 부모님의 저녁 잠자리를 봐드리고, 아침 일찍 찾아뵙고 밤새 평안하셨는지 안부를 여쭙듯[昏定晨省] 꽃을 보살폈다. 손길이 가는 만큼 꽃나무들은 제 몫의 꽃을 피워냈다. 보살피는 데 전혀 성가시거나 부담이 되지 않았다. 다만 속으로 이렇게 자신을 조롱했다. 안 계시는 부모님을 이렇게 섬겼더라면, 효자 소리 들었을 것이라, 그게 전부였다.

꽃을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마디씩 던진다. 때로는 핸드폰을 들이대고 사진을 찍는다. 또 누구는 꽃의 이름을 묻기도 한다. 어느 분은 하시는 김에 꽃마다 이름표를 달아주면 어떻겠느냐고 건의한다. 또 누구는 목마르지 않게 물을 주자면 수도료도, 꽃모종 구입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겠다며, 내 경제사정까지 염려해 주신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나를 타이른다. 아무리 힘들어도 혼정신성만 하겠느냐?

행인들이 던지는 말은 한결같다. 꽃이 참 아름답다, 어여쁘다, 곱다 …… 보기에 좋다면서 좋아들 하신다. 꽃을 보고 누구 하나 싫다거나 언짢아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꽃의 됨됨이가 그렇다는 것은 진즉부터 알고 있는 상식이요, 원형적 성정이지만, 꽃을 칭찬하는 말은 나쁘지 않은 효과가 있다.

그런데 정작 나는 꽃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꽃을 가꾸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조실부모한 자신의 처지 때문에 꽃을 대용물로 삼아 보살피는 것도 아니다. 꽃이 시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자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꽃이 얼마나 목말라 할까? 꽃의 목마름에 응답할 뿐이다. 그렇다면 아예 꽃을 심지 않았다면, 꽃이 목말라하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될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나에게 그런 반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나답게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다. 내 인생은 내 스스로 나를 귀찮게 하는 길이 정도라는 믿음을 실천할 뿐이다. 그것이 내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가꾸는 일이라는 믿음을 구현할 뿐이다. 나의 심연에서 시를 살고 쓰는 일도 여기에서 멀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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