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창(封窓)
봉창(封窓)
  • 김규원
  • 승인 2024.12.19 10: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금요 수필
김고운/수필가
김고운/수필가

지금 사람들은 창문이라면 유리 창문을 생각하지만, 내가 어릴 적 시골에는 유리창보다는 창호지를 바른 창이 대부분이었다. 대청이 있고 제법 규모가 있는 기와집이어야 미닫이와 여닫이를 갖춘 이중문을 달았고 남향에 반닫이 위로 큰 창문을 내고 살았다. 대개 2~3칸 작은 집엔 들창문을 내거나 봉창을 내서 채광하는 정도였다.

가난한 사람들의 방은 굴속처럼 어둡고 장판이나 도배도 하지 않고 삿자리나 돗자리를 깐 바닥에 벽은 흙물을 칠해서 매끈하게 하거나, 값싼 피지 한 겹을 발라 흙이 묻어나지 않도록 했다.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는 방문과 빛이 잘 드는 쪽에 뚫린 동그랗거나 네모지게 창틀도 없이 낸 봉창이야말로 방에 빛이 드는 유일한 통로였다.

창의 종류 가운데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창이 봉창이다. 봉창을 내는 가옥은 흙과 돌을 켜켜이 쌓아 외벽을 세우고, 안팎에 흙과 잘게 자른 짚을 섞어 발라 마감하는 작고 낮은 구조였다. 방 한 칸이거나, 방의 어간(於間)을 막아 칸을 나눈 구조의 집이었다. 낮고 작은 출입문을 나무로 짜고 문살은 대나무를 갈라 겉대를 얇게 벼려서 X자로 엮어대고 그 위에 창호지를 발랐다.

봉창은 채광과 간접통풍의 효과를 위해 만들었다. 대개 집의 동쪽에 봉창을 내었는데, 아침 햇귀가 올라오기에 앞서 봉창은 희붐하게 새벽이 열리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봉창은 새벽부터 밭에 나가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을 깨우는 시계였고 자명종이었다.

동창(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칠 아이는 여태 아니 일어나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하느냐?”라던 남구만(南九萬) 시조의 동창과는 형태가 다르지만, 비슷한 기능의 봉창이다. 일반 가옥구조에서는 동쪽으로 큰 창을 내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직사각형의 들창문을 내서 아침을 알리고 방의 채광을 돕는 용도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움막처럼 작은 집을 지어 드나드는 방문을 허리를 숙여 들어가야 하도록 작게 만들고, 네모진 문틀에 문살을 넣은 창을 내지 않은 것은 방의 외풍을 막기 위해서다. 겨울에 문고리를 잡으면 쩍쩍 들러붙을 만큼 추웠다. 가난한 그들에겐 나무 문틀과 문짝을 만들 돈도 없었다. 봉창이 제격이었다.

봉창은 반드시 동쪽에만 내는 건 아니었다. 흙으로 벽을 쌓고 나무 서까래를 얹고, 그 사이를 새끼로 얽은 다음 짚을 섞은 흙으로 천정을 마감한 지붕 위에, 짚으로 이엉을 엮어 얹은 초가는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했다. 창을 크게 내면 자연 냉난방이 흐트러지므로 부득이 채광을 위해서 북쪽에도 봉창을 내기도 했다. 북쪽의 봉창은 가능한 높은 위치에 만들어 채광과 환기의 효과를 거두었다.

봉창의 용도는 다양했다. 환기와 채광의 용도 이외에 외부와 연락하는 초인종의 구실도 했고, 비밀스럽게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 커뮤니케이션하는 수단도 되었다. 봉창을 두드려서 방 안의 사람을 부르거나 긴급 신호를 알리기도 했고, 봉창에 그림자나 어떤 흔적이 지나가도록 하여 남몰래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라는 속담의 봉창이 바로 이것이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봉창에 작은 유리 조각을 대서 밖을 내다볼 수 있게 했다. 봉창만 아니라 방문에도 작은 유리를 대어 발라서 밖을 내다볼 수 있게 하였는데, 그 유리를 통하여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유리 위에 커튼을 달 듯 작은 창호지를 덮고 끝에 대나무 줄기나 잔가지를 감아 두기도 했다.

서양의 성당에 스테인드글라스가 멋을 부리듯 우리 창호지 창문에도 국화잎이나 은행잎, 억새꽃 등을 붙이고 창호지를 발라 소박한 멋을 내기도 했다. 그 옛날 어디서 언제인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어떤 가난한 사람의 집 봉창에 소박한 산수화가 정말 감탄할 수준의 그림을 본 기억이 있다. 지나가던 사람을 재워준 일이 있었는데, 떠난 후에 보니 그림이 그려있었다고 했다. 햇빛이 비치는 방향이나 정도에 따라 그림이 다르게 보인다고 했다. 장판도 바르지 못한 삿자리 방이 작은 그림 한 폭이 넉넉함으로 비치던 그때 느낌이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어슴푸레하게 남아 있다.

석유가 귀하던 시절에 가난한 농촌에 가면 삿자리를 깐 방 두 칸의 사이 벽을 뚫은 곳에 등잔을 두어 호롱불 한 개로 두 방을 밝혔다. 지금 사람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가난이었지만, 마음을 나눌 줄 알았고, 정이 흐르는 사회였다. 가난 속에서도 손님이 오면 한 끼 밥을 나누어야 마음이 편했다. 굴속처럼 어두워도 따끈한 장작불로 덥힌 삿자리 방에서 호롱불 끄름에 콧구멍이 꺼메지도록 자고 봉창의 새소리에 잠이 깨면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60년대 무렵 공무원 생활을 하던 시절에 방문했던 숱한 산골 집에서 봉창을 보았다. 여닫을 수도 없고 크기도 겨우 한자 남짓의 작은 봉창은 막힌 듯했지만, 열려있던 그 시대의 소통하는 통로였다. 봉창을 기억하는 사람은 나이 많은 노인들이다. 젊은이들은 그런 창을 볼 수 없고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고, 가난했던 시대 농촌의 하찮은 풍경이었다. 그러나 작은 흙집에 빛과 공기를 소통시키던 그 작은 공간이 있었기에 가슴에 정을 담아 아들딸과 손자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그 창을 통해 정과 사랑을 배웠던 사람들이 살던 세상은 오늘처럼 삭막하지 않았고 돈을 위해 목숨을 걸지 않는, 사람 사는 세상이었다.

요즘 창은 모두 유리이고 널따란 통유리 창을 통해 세상을 볼 수 있지만, 그 투명한 창은 세상을 향해 열려있지 않다. 눈에 보이기만 할 뿐, 소리가 들리지 않고 마음이 통하지 않는 철창문(鐵窓門)인 셈이다. 종이로 바른 그 시절의 봉창을 생각하는 마음은 서로 마음을 열고 살던 따스한 세상이 그리운 마음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