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세차 을사년 정월 열여드레 우리 산악회 회원 모두는∼” 제문 읽는 소리가 백두대간 골 따라 낭랑하게 울린다. 설 지나 첫 산행을 고하는 시산제다. 주말이면 산을 찾는 산사람들이 올 한해 안전 산행과 무탈을 빌었다. 장수 천천면 소재 천반산이다.
장수는 한반도의 골격을 이루는 백두대간 허리에 자리하고 있다. 지리산으로부터 북으로 올라오면 1,000m 이상급 봉우리만 해도 장안산(1,237), 남덕유산(1,507), 서봉((1,492), 사두봉(1,014), 할미봉(1,016), 팔공산(1,151) 등 6개이다. 산이 높다.
물도 길다. 신무산 뜬봉샘에서 솟아난 물은 수분리에서 좌우로 갈라진다. 남으로 섬진강, 북으로는 금강을 이루어 흐른다. 장안산 무룡재에서 발원한 물은 서북으로 금강, 서남으로 섬진강 그리고 동남향으로 낙동강에 합류한다. 산고수장(山高水長) 장수다.
'山高水長, 長水 향우회 모임' 멋지다. 강의실 칠판 귀퉁이에 누군가 적어놓았다. 80년대. 보통 학기가 시작되는 3월, 대학 내에서는 각종 써클(동아리)과 향우회 모임이 있었다. 간결하면서도 지역의 특성을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산고수장. ‘산은 높이 솟고 강은 길게 흐른다.’로 군자의 덕이 높고 끝없다. 덕행이나 지조의 높고 깨끗함을 산과 강에 비유하여 이른 말이다. 원문은 중국 송나라 범중엄의 ‘엄선생사당기’에 나온다. 국내에도 동해 무릉계곡, 청도 거연정, 거창, 문경, 고창 등 방방곡곡에 암각과 현판으로 수없이 새겨져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이 한 독립운동가에 써준 산고수장이 지난 2021년 경매시장에서 화제가 된 적도 있다.
장수의 산은 부드럽다. 넉넉하다. 장수는 모나지 않은 둥근 봉우리 밑에 자리한 고원으로 TV 날씨 소식에 언제나 단골이다. 한반도에서 백두산의 개마고원을 제외한, 강원도 대관령보다도 무진장 지역이 속한 진안고원이 훨씬 넓다. 평균 400m 이상 고지다. 장수가 일교차가 가장 크다.
최근 날씨도 영하 19°까지 내려갔다. 기상청 날씨누리에도 분지 지형 형태로 소백산맥 서쪽, 지리산 북서쪽으로 서리가 늦게까지 오고, 첫서리가 일찍 내려 농작물에 많은 영향을 준다. 연평균 기온 10.7(전주 13.7), 연교차 26.4°이다.
현업시절 장수를 찾아 방송할 때는, 군청 마당에 대형 온도계탑 설치를 제안하기도 했다. 날마다 장수 날씨를 전국에 알려, “한국에서 일교차가 가장 큰 지역으로 각인시켜 농축산물 마케팅에 활용하라” 아이디어를 냈다. 「하이랜드 장수」
장안산·육십령·남덕유산 백두대간 등줄기 밑에 계북·장계·천천·계남·장수·번암이 자리하고 있고 팔공산 너머 서쪽에는 산서면이 있다. 모두 7개 읍면이다. 2024년 말 인구는 2만663명. 전북 14개 시군 중 가장 적다.
“참 걷기에 편해요. 자갈 하나 없는 육산이네. 푹신, 푹신하니∼” 사두봉 거쳐 방화동 계곡으로 산행할 때 지기가 건넨다. 11km 산길이 대나무와 소나무, 도토리나무 숲이다. 흙길이다. 무룡재에서 시작되는 장안산 주 능선길 3.5km. 역시 툭 트인 조망에 완만한 흙길이다. 리본이 달려있다.
「장수트레일레이스」 생소했다. 장수군에서 4년 전부터 시작한 일종의 산악마라톤이다. 장수읍 종합경기장을 출발해 와룡휴양림·팔공산·뜬봉샘·사두봉·장안산까지 원점 회귀하는 70km. 그리고 38, 20, 100km까지 다양하다. 지난해 9월 말에 열린 네 번째 트레일 레이스에는 수백 명이 참가해 장수의 산하를 눈으로 보고 느끼며 뛰었다. 성공적이었다. 전국 어느 지역보다도 풍광이 좋고, 달리는 길이 편해서 좋다는 평이다.
“군청 소재지로 연결되는 국도나 지방도에 4차선 도로가 없는 곳은 전북 14개 시군 중에 장수밖에 없습니다. 꼭 해결하겠습니다” 지난 지방선거 때 장수읍 시장 앞에서 최훈식 군수 후보는 이렇게 토해냈다. 듣고 보니 그랬다. 충격이었다. 대전·진주 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고립무원 산골이었다. 하지만 지구촌 기후 위기 시대. 이제 천혜의 ‘산과 물’이 장수의 상품이다.
아그리투리스모(Agriturismo). Agri(농업), Turismo(관광). 농업관광이다. 1980년대 이탈리아 오르비에토로 대표되는 느림의 미학(Slow movement).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개발중심주의에서 느림 보존주의 지향 운동이다.
국내에서는 경남 하동 악양면과 전남 담양 창평면이 슬로시티로 지정이 되었지만, 장수는 고택(故宅)· 고풍(古風) 위주의 작은 지역 슬로시티와는 결이 다르다. 높은 산과 물로 이루어진 ‘군(郡) 전체 자연’이 있다. 한국에서 살기에 가장 좋은 땅이다. 한때 일본 후쿠시마 원전 난리 이후 일본인들이 장수에 집단으로 이주하려 한다는 소문까지 떠돌지 않았던가.
영국 스코틀랜드의 ‘스코티시 하이랜드(Scottish Highland)’. 미국, 베트남, 말레이시아에서도 하이랜드가 뜬다. 한국에서도 많이 방문한다. 멀리 갈 거 없다. 기후 위기 시대. 지역의 정체성을 꼭꼭 담아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산고수장, 장수>에 주목하는 이유다.
#김정기(前 KBS전주 편성제작국장). PD. 1994년 다큐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시작으로 ‘무주촌 사람들’ ‘키르기즈 아리랑’을 만들었다. ‘지역문화’와 ‘한민족 디아스포라’에 관심이 많다. 전북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노력한다.
이렇게장수에 관련올려주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