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존재는 자기를 증명하려 한다”
“모든 존재는 자기를 증명하려 한다”
  • 전주일보
  • 승인 2024.07.22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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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詩想隨想 - 72

 

 

 

봄악장을 연주하는 소쩍새는

제 이름을 찾아 제 이름으로 운다

청상과수댁 여름목간을 훔쳐보다

떠돌이가 된 머슴새는

홀딱 벗고~! 홀딱 벗고~!

이산저산 제 몸 찾아 운다

내장산 내장사 녹음 깊은 여름골짜기는

제 몸 후려치며 독경소리로 운다

희수를 넘어

아니 그보다 더한 팔순이가 되어도

팔불출처럼 어린애처럼 징징대며

엄마 찾는

열 살적 어린 노인도

제 몸이 악기라서 운다

여직 운다

 

졸시제 몸이 악기라서 운다전문


모든 존재는 자신의 됨됨이를 스스로 밝히며 산다. 아니 존재의 삶 자체가 존재증명이 된다. 어떻게 사는가? 자기답게 산다. 자기다움은 존재의 가장 뚜렷한 증표가 된다. 그렇지 않은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게 본다면 귀천이 따로 없으며, 사람과 사물을 구별할 필요도 없으며, 나아가 나와 네가 따로 있을 수 없다. 모든 존재는 자기 증명을 위해 끊임없이 울고 웃으며 한 세상을 간다.

소쩍새가 그렇게 울어서 소쩍새가 되었을 것이다. 뻐꾹새는 또 어떤가? 그렇게 자신의 됨됨이를 왜장치고 다니기를 마다하지 않아서 그 이름을 얻었다. 그렇게 소쩍새는 계속해서 제 이름을 부르며 이 산 저 산 옮겨 다니며 존재증명을 한다. 뻐꾸기도 마찬가지다. 뻐꾸기가 소쩍소쩍 울어서는 안 되며, 소쩍새가 뻐꾹 뻐꾹 울어서도 안 된다.

비둘기는 왜 제 울음소리로 이름을 얻지 못했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짝짓기 철이 되면 가깝고 먼, 이 숲 저 숲에서 울리는 애절한 부름에 귀 기울여 본 사람은 안다. 꾸룩꾸룩하는 것 같기도 하고, 구루룩구루룩하는 것 같기도 한, 비둘기들이 짝을 부르는 소리를 듣다보니 비둘기 []가 떠올랐다. 아하~! 그러면 그렇지! 한자에서 비둘기를 라 한 것은 틀림없이 비둘기들의 이 울음소리, 짝을 부르는 소리에서 얻었을 터이다. 그러니 비둘기들도 제 이름을 부르며 저의 존재 증명을 위해 애달프게 울어 젖힌다.

구수회의鳩首會議란 말이 있다. 비둘기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듯이, 여럿이 한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거나, 또는 그런 회의를 뜻하는 말이다. 학구소붕鷽鳩笑鵬이란 말도 유용하게 쓰인다. 작은 비둘기가 큰 붕새를 보고 웃는다는 뜻으로, 어리석은 소인배가 위대한 사람을 몰라보고 비웃음을 이르는 말이다. 이때 학은 구와 마찬가지로 작은 비둘기를 뜻한다. 모두가 비둘기들이 모여서 저들끼리 뭐라고 꾸룩꾸룩 구루룩구루룩 서로를 부르는 소리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둘기들의 존재 증명인 셈이다.

옛날 반상 질서가 완강할 때, 부잣집 머슴이 여름날 나뭇짐을 벗어놓고 뒤꼍 우물가로 향하다가 문득 발길을 멈췄다. 주인댁 청상과부가 여름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목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머슴은 그 길로 과수댁을 향한 상사병을 이기지 못하고 생을 다하고 말았다. 충직한 머슴을 귀히 여긴 주인댁이 그를 선영 아래 묻었는데, 그 머슴이 승천하여 새가 되었다고 한다. ‘저승새라고도 불리는 이 머슴새는 오뉴월이 깊어지면 이 산, 저 기슭을 옮겨 다니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소리쳐 울부짖는다. 잘 들어보면, “홀딱 벗고~! 홀딱 벗고~!” 살아서 하지 못한 말을 죽어서라도 하고 싶다는 소리처럼 들린다.

여름 내장산을 찾았다. 장마전선이 오락가락 소나기 퍼붓기를 무슨 게릴라 기습작전처럼 요란했다. 여름 내장산은 깊은 골짜기가 아니라도 그 짙푸른 녹음으로 인하여 이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녹음바다를 이룬다. 세상 사람들은 가을 단풍을 내장산의 으뜸으로 치지만, 필자만의 편견인 줄 모르겠으나, 봄의 신록이 으뜸가는 내장의 백미白眉라면, 여름녹음은 내장의 속내를 풀어내는 선승의 법어法語처럼 짙푸르다.

골짜기를 따라 걷다 보면 계곡물이 어느 대목에선 졸음을 재촉하는 땡중의 하나 마나 한 설법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대목에선 선성 깊은 선지식善知識의 방할棒喝처럼 요란하다. 은 몽둥이 ()’이고, 은 꾸짖을(소리칠) ‘()’이다. 선승들은 선지식의 몽둥이질 하는 데서 깨달음의 실마리를 찾고, 소리쳐 꾸짖는 데서 도를 알아차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실은 참승이라면 방할’-고승의 꾸짖음에 매몰되어 화두를 깨치려 하지 말고, 스스로 구경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자발적 선심禪心만이 길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내장산 골짜기뿐이겠는가. 여름 게릴라 성 소낙비를 만난 계곡은 제 몸이 악기라도 된다는 듯이 온몸으로 온 산을 쩌렁쩌렁 울려가며 연주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 자연의 교향곡에 귀를 묻어두고 걷노라면, 온 세상에 악기 아닌 사물은 없다는 것을 실감하고 만다. 제 몸이 악기인 존재들은 제 몸을 두드리고, 제 몸을 뜯어가며, 제 몸을 할퀴어서라도 저의 존재증명을 하려 한다. 그 소리가 울음이었건, 아니면 세상을 향한 포효가 되었건, 듣는 이는 그 악기의 소리를 통해서 비로소 존재의 실상을 실감하게 된다.

열 살 전후해서 양친을 잃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의 몸은 자신의 됨됨이를 스스로 증명하려는 울음통을 지닌 존재로 자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희수喜壽가 되었건, 아니면 팔순八旬의 고개를 까딱거리며 넘어가건, 제 몸을 악기로 울음 우는 것을 나무랄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울음통이 스스로 존재를 증명하려는 짓을 누가 있어 나무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런다. 모든 존재는 결국 자신의 됨됨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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