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안 바르게 산 자의 하얀참말은 방방곡곡 양지바른 곳 자연석에 새겨 잘 사는데 열아홉 순둥이의 바른 삶은 왜 수첩에 새긴 대로 자연수를 누리지 못하고 꺾여야 하는지
낮은 세상 슬픈 엄마들은 알고 싶습니다 내 아들딸들이 왜 죽어야하는지
[일터에선] 조심히 예의(있게) 안전(하게) 일하겠음 성장을 위해 물어보겠음 파트에서 에이스 되겠음 그리고 [부모에겐] 엄마 요새 뭐 땡기는 거 없어? 과일이라든가 (괜찮다) 뭘 또 없어. 생각해봐봐……
전주페이퍼공장 6개월 차 신입사원 순둥이 공장 3층에는 싸늘한 주검을, 황금뇌 세상에는 학습근로자 노트를, 자술한 묘비명처럼 남겼습니다
착하게 살면 슬프게 죽는다
졸시「생각해 봐봐」전문 |
지자체에서 조성한 시민공원 등 양지바른 곳에는 여전히 불가사의한 문구가 버젓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거대한 자연석에 궁체로 쓰인 ‘바르게 살자’는 석비입니다. 보기만 해도 혐오감이 들어 외면하기 일쑤지만, 예사롭지 않게 거대한 돌에 새겨진 단 다섯 글자가 풍기는 인상은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모습을 반영하는, 묘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이 비석이 어떻게 해서 서게 되었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이 땅 민주의 봄을 깔아뭉갠 12.12군사반란의 괴수 전두환 일당이 사주한 ‘바르게살기운동’이란 협의체가 있습니다. 민주화의 열기를 철권을 앞세워 무지르고 말았던 반동분자들.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의 열망을 마치 적군과 교전하듯 민간인들을 무차별로 살육했던 5.18광주민주혁명의 학살자들. 누구도 선출하지 않았음에도 체육관 선거로 스스로 대통령이 되어 국권을 농단했던 자들이 내걸었던 구호입니다.
그들은 가장 비열하게 살았으면서, 무자비하게 민주화의 열망을 꺾었으면서, 총칼을 휘둘러 강권통치를 자행했으면서도, 입으로는 “정의사회 구현”이요, “바르게 살자”고 외쳐 댔으니, 이보다 더 참담한 블랙코미디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생각과 행동으로 가장 바르게 살지 못한 자들이 입으로는 바르게 살자고 왜장치고 있으니, 듣는 이들은 얼마나 참담했을 것이며, 이를 퍼 날라야 하는 하수인들은 또 얼마나 자가당착[自家撞着: 자신의 주장이나 행동이 서로 모순되어 일관성이 없음]하여 참혹하였을까요?
이와 같은 자기모순의 위험성은 우리 사회 도처에서 여전히 독버섯처럼 자생하거나, 더욱 창궐하여 건전하고 양식 있는 사람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시사인』(878호)의 보도에 따르면 <전주페이퍼 전주공장> 근로자 ㄱ씨는 지난 6월 16일 일요일임에도 혼자 3층 배관설비를 살피다 쓰러져 심정지 상태로 발견되어 응급실로 이송됐지만, 끝내 9시 45분 사망 판정을 받습니다. 8시에 업무를 시작하여 9시 45분에 주검으로 바뀌었으니, 작업 개시 불과 두 시간도 못되어 일터가 죽음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과도, 죽음에 이른 경위도 밝히지 않는 전주페이퍼 공장 앞에서 ㄱ씨 엄마는 상복을 입은 채 피켓시위를 하였습니다. “알고 싶습니다. 만19살 우리 아들이 왜 죽어야했는지?” 피맺힌 엄마의 눈물어린 하소연이 있은 뒤, 공장 측과 합동 조사기관이 당시 상황과 비슷한 조건을 마련하여 실험하고 조사한 뒤에야 마지못한 듯 사과하였습니다. 6일간 기계작동을 하지 않는 동안 배관에서 유독가스가 발생하였다는 것을 인정한 셈입니다.
ㄱ씨는 순천의 특성화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지난 해 11월에 전주페이퍼에서 실습을 시작했고, 한 달 뒤 12월에 정규직으로 입사했습니다. 겨우 6개월 근무하는 동안 ㄱ씨는 매우 성실하였으며 충실한 직원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학습근로자 노트>에는 그의 성실성은 물론 창창한 미래를 내다보는 꿈 많은 젊은이의 설계로 가득합니다. 볼수록 안타깝고, 더 볼 수 없을 정도로 눈시울을 적시게 합니다.
“조심히 예의(있게), 안전(하게) 일하겠음, 성장을 위해 물어보겠음, 파트에서 에이스가 되겠음”이라고 자기 자신을 향한 다짐으로 빼곡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싶은 신입사원의 순결한 의지가 엿보입니다. 일과 함께 미래를 향한 성장 의지도 다부지게 담아두었습니다. “인간은 그의 선택을 통해 자신을 창조한다.”(장 폴 사르트르)고 했습니다. 이로 미루어볼 때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만 아니었더라면, 그가 선택한 인생 설계와 다부진 직업의식으로 보아 이 땅에 한 건실한 인간이 창조되었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ㄱ씨는 직장맘 엄마에게 자상하고 애교 많은 아들이었습니다. 엄마는 내 아들이 너무 일찍 철이 들었다며 가슴을 쥐어뜯습니다. 자신도 월급쟁이라며 고생하는 엄마를 살뜰히 챙기는 정감 넘치는 효자였습니다. 수시로 엄마에게 메시지를 넣습니다. “엄마, 요새 뭐 땡기는 거 없어? 과일이라든가…” 그럴 때마다 엄마는 “뭘 또 괜찮아!” 사랑으로 지청구합니다. 그러면, 아들은 “뭘 또 없어. 생각해 봐봐!”하며 엄마를 채근했습니다.
착한 심성의 한 젊은이를, 꿈 많은 한 직장인을 사회(직장)는 보호해 주지 못했습니다. 위험이 가득 찬 작업장에 19살 신입사원을 홀로 투입하여 한 생명은 물론, 엄마의 가슴에 돌이킬 수 없는 좌절을 안겼습니다.
그가 엄마에게 보냈던 메시지가 ‘바르고 착하게 살면 슬프게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냐며, 황금을 목숨보다 귀히 여기는, 우리 사회에 던지는 경고장처럼 들립니다. “생각해 봐봐!”